송운스님 법어/♣ 禪을 즐겨라

禪을 즐겨라 - 8만4천 법문은 자유의 세계로 안내하는 지침

아산 보문사 2016. 3. 31. 18:37

 

8만4천 법문은 자유의 세계로 안내하는 지침

 

禪을 즐겨라-제1편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선에 대한 인식(1)

 

1. 자유롭게 사는 방법

자유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인류 공통의 바람이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구가하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며 혹은 다투고 싸워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바라는 대로 자유를 구할 수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자유를 구하는 행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지위(地位)가 인신(人臣)의 극에 달하고, 천하를 살만 한 부(富)를 축적해도, 혹은 천하를 손에 넣어 권력과 재력을 마음 내키는 대로 휘두를 수 있어도 진실한 자유를 획득하여 평안한 인생을 건설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인류 역사 속에 진실한 자유를 획득하고 평화로운 인생을 창조한 일련의 사람들이 있다. 다름 아닌 선사(禪師)들이다. 선사들은 불교를 통해 자유를 획득했고 평화로운 인생을 살았다. 부처님으로부터 발원한 불교에는 8만4천 가지의 방대한 법문(法門)이 있다. 이 8만4천 가지의 법문이 가리키고 있는 것, 그 지향점과 목적은 ‘해탈(解脫)’이다. 해탈이란 매듭을 푼다는 것이며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푼다는 것이며 무엇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인가. 일체의 계박(繫縛)을 푼다는 것이며 모든 속박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자유하기 짝이 없는 세계로부터 빠져 나와 자유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 8만4천 가지 법문이다.

인간은 지식과 물질을 이용하여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고 문화를 향상시켜 인생을 기름지게 한다. 증기의 발견과 전기, 원자로 이어지는 에너지원의 발전으로 우리 물질 환경은 실로 눈부신 진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 변화 속도는 일진월보(日進月步)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분진초보(分進秒步)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컴퓨터는 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첨단문명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명을 적극 활용하여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누구나 원하고 있다.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도 삶이 속박되어 있다면
 재미도 신나는 일도 없어, 선은 자유로 가는 외길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문화는 인간이 이용하는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체라는 사실이다. 지식이나 물질, 모든 것이 인간이 이용하는 대상일 뿐이다. 인간의 주체성이 흔들리면, 다시 말해 우리들이 문화에 사역(使役)된다든지 지식과 물질에 사역되게 된다면 그것은 완전히 주객전도인 셈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주체성을 상실하고 객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유를 잃고 만다. 바꿔 말하면 속박되어 이른바 ‘계박(繫縛)의 몸’이 되고 마는 것이다.

풍족한 재산이 있는 자라도 자신의 재산에 속박되어 자유를 잃고, 지식 있는 자라 할지언정 자신의 지식에 속박되어 자유를 잃고, 힘 있는 자라 해도 자신의 힘에 속박되어 자유를 잃게 된다. 그렇게 해서 재산 있는 자는 재산에 질질 끌려 휘둘리며, 지식 있는 자는 지식에 질질 끌려 휘둘리며, 힘 있는 자는 도리어 자신의 힘에 질질 끌려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강약(强弱)과 다소(多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러 가지에 속박되어 있는 ‘계박의 몸’임이 분명하다. 거리를 활보하고 있음에도 감옥에 사는 사람이며, 우리 속에 갇힌 새와 다를 바 없는 신세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란 있을 수 없다. 일상의 의식주 생활은 물론이고 남녀 간의 사랑도, 사업도, 인간관계도 모두 수동적인 의무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활력이 없으므로 어정쩡하고 뜨뜻미지근한 삶이 되고 만다. 도무지 재미도 신나는 일도 없다. 한마디로 회색의 인생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다운 생활, 매일 매일 진실하며 윤기 있는 생활, 신나고 희망에 차고 나아가 경쾌한 생활을 바란다. 단지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속박이나 계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불교에서 ‘해탈’에 기본적인 목표를 두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해탈’에 이르는 방법과 수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은 선(禪)을 통한 길이다. 선이야말로 해탈에 도달하는 평평하고 넓은 대도(大道)이며 자유에의 외길이다. 선사들은 이 길을 통해 자유와 평화를 맘껏 만끽했다.

2. 인생의 목표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먹고 무엇 때문에 사는가. 생존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은 실로 어려운 문제다. 동양사상사에서 자유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책이 《임제록(臨濟錄)》이다. 저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은 젊은 시절 정신적 동요를 크게 겪으면서 선을 수행할까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그는 황벽(黃檗 ?~850) 문하에서 깨달았으며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 불린 인물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 임제가 마음먹은 점은 그런 지위를 모조리 박탈해 버리는 데서 진실한 인간상을 찾자는 것이었다.

  
▲ 삽화=강병호 화백


무위의 인간상은 차별을 부르는 사회적 신분과 지위가 적용되지 않을 때 가능하다. 지위란 모두 가짜 위상(位相)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지위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그러나 이는 진실한 마음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 같은 지위에 엮여진 일상생활은 모두가 거짓에 불과하다. 허식의 보따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화장발에 속지 말라는 말이 있다. 외양을 꾸며 상대방의 눈을 화장술로 끌어들이는 것을 경계하여 그 속의 진짜 모습을 보라는 말이다. 이러한 허식을 떨쳐버리고 ‘참나’를 관찰하라는 것이 임제의 주장이다.

임제는 그리하여 “내 눈앞에서 드나들고 있는 그대들, 그대들이야말로 참사람이다. 그대들은 부처님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누군가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면 임제는 “부처는 아무 데도 없다. 그대들이 부처가 되면 그만이다.”고 설명했다. 하나의 획기적인 사상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품을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개성을 보는 것
 견성의 일대사가 해결되면 명쾌한 삶이 활짝 열려 

현대사회는 풀기 어려운 갖가지 난제들을 안고 있다. 이 난제를 풀지 않고 피해갈 수만은 없다. 우리는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이 같은 난제를 지혜롭게 풀거나 대처해 나가면서 급변해가는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사고의 전환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발상의 전환이 언제든 요구된다는 것이다. 선은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생각하면 할수록 명쾌하게 해결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선(禪)에서는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그리고 똑바로 틀을 잡는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견성(見性)’이다. 견성이라는 일대사(一大事)가 선의 근본인 것이다. 견성, 즉 성품을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개성(個性)을 본다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本性)을 확인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좌표 속에 일점을 점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을 달관하는 것이다. 견성의 일대사가 해결되면 복잡다단한 인생은 간단하고도 명쾌하게 설명된다.

인간은 각기 자기 자신의 개성을 갖고 있다. 자성(自性)이라든가 천성(天性), 천품(天稟), 천부(天賦), 부성(賦性)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명칭은 달라도 우리들이 갖고 태어난 우리들의 성질이 우리들의 개성인 것이다. 이 개성을 적확히 꿰뚫어 보는 것이 바로 ‘견성’ 즉 ‘깨달음’이다.

개성을 완전하게 성장 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들 자신의 개성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하다 보면 자칫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 쉽다. 그러나 개성이라는 것을 편의상 우리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동물이나 식물의 경우로 옮겨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진상(眞相)을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일생을 풀이나 나무의 일생에 비유해서 보면 인생의 목표라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소나무는 소나무로서, 벗나무는 벗나무로서, 매화나무는 매화나무로서, 국화는 국화로서 또한 개(狗)는 개로서, 새(鳥)는 새로서 각기 그 개성을 갖고 있다. 이 개성을 완전히 성장 발전케 하는 것이 생물의 유일한 목적이다. 성장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생물의 생존목표인 것이다. 영양분을 섭취하여 개성을 완전히 성장시킨다. 그렇게 해서 개성이 갖고 있는 기능을 완전히 발전시킨다. 천수(天壽)를 다하면 시들어 죽는다. 이것이 생물의 일생이다. 심하게 말하면 이것이 생물의 숙명이다. 먹고, 움직이고, 죽는다. 이것이 바로 에누리 없는 삶의 진상이며 귀착점이다. 어떻게 먹을까. 어떻게 움직일까. 어떻게 죽을까. 인생의 진리란 바로 이것이다.

- 재단법인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