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즐겨라 - 제1편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선에 대한 인식(4) 선은 지극히 평범하고 우리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보면 돼 그렇지 않을 경우 어려워져
불립문자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의미이거니와 교외별전 역시 글로 표명할 수도 없고 사람을 가르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스스로가 실제로 경험하고 직접적으로 체득하는 것 외에 ‘선’을 손에 넣는 방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알려면 첫째, 자신이 직접 좌선을 해야 하며 둘째로 선사(禪師)들이 어떻게 ‘선’을 체득했는지 선인들의 언행을 알아야 한다.
좌선은 ‘선’을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 좌선을 함으로써 신체와 정신의 대 조화를 꾀하고 심신일여(心身一如)와 인간일체(人間一體)의 기반이 되는 근본적인 인간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선사들의 언행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 어떠한 시각으로 사물을 보았는가, 또 생각했는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고찰하여 우리 자신이 ‘선’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단서로 삼고자 함이다.
‘선’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지만 그렇다고 후진들을 위한 지도의 손마저 포기해선 안 된다. 후진들을 지도하자면 인간에게 주어진 언어와 행위는 매우 적절한 수단이다. 언어로 가르치고 행위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선’이지만 언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행동으로 완전히 지시하는 것이 곤란하다 해도 행동으로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예로부터 선인들이 후진들을 위해 숱하게 남긴 말과 제시한 행위는 ‘선’을 이해하고 체득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다.
‘선’의 요체를 체득하고자 한다면 선사들의 언어와 행위를 실마리로 하여 옛사람의 이력을 스스로의 거울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선사들의 일언일행(一言一行)을 철저히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선’을 체득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이자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불립문자인 ‘선’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또 교외별전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이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다. ‘좌선에 의해서 바로 사람의 마음을 직관하여 부처님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것 외에 ‘선’은 없는 것이다. 그 유일한 수단과 방법이 두말 할 것 없이 좌선이다. 좌선이야말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심처(深處)를 향하여 나아가는 유일무이한 수행법이다. 심처에 도달하여 자기 자신의 본존(本尊)을 적확하게 똑똑히 깨달아 보는 것이 이른바 ‘견성’이다. 그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성불’이다. 그 심처야말로 진정한 극락세계이다. 그 본존인 자기 자신이 바로 살아있는 부처다. 진정한 극락세계는 서방십만억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좌선을 꿰뚫게 되면 겨우 한발만 들어서도 극락왕생하게 되는 것이다.
| | | ▲ 삽화=강병호 화백 |
극락이라든가 부처라든가 하는 말을 쓰면 곧 우리들과 인연이 먼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극락세계야말로 우리 현대인이 구하고 또 구했던 진정한 ‘자유의 천지’이며 이 부처야 말로 우리들이 찾고 또 찾았던 ‘자유의 사람’이다. 좌선을 실참실수(實參實修)하면 우리는 절대의 자유가 몸에 밴 살아 있는 부처가 된다. 이른바 즉신즉불(卽身卽佛)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자유의 인간이 되었을 때 우리의 주위는 일변해서 극락세계가 된다.
‘선’은 일반적으로 유현(幽玄)하고 고원(高遠)한 것으로서 쉽게 가까이 할 수 없을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선’은 실제로는 지극히 평범하고 가까이에 있다. 우리 자신의 본체본질(本體本質)을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평범하고 쉬운 ‘선’의 대체를 유현고원(幽玄高遠)한 것이라고 오해하는 까닭은 왜일까? 선은 실제로 좌선하여 체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을 과학을 연구하듯이 지식에 의해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간다면 어려움 없이 체득되는 것을 복잡한 지식으로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유현하고 고원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긴 세월 동안 애써 배우고 익혀서 입게 된 여러 가지 거추장스런 옷을 남김없이 모조리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좌선을 실참실수해야 ‘선’을 체득할 수 있다.
천상의 달을 탐내다가 손 안에 든 구슬을 잃어버린다는 얘기가 있다. 자신이 갖고자 하는 구슬은 자신의 손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의 손 안에 구하고자 하는 것이 먼 옛날부터 쥐어져 있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천상을 찾아 헤매기 때문에 유현하고 고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구슬은 천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손 안에 꽉 쥐고 있는 것이다. 손을 펴보기만 하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이 구하고 있는 것은 먼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발밑에 굴러다니고 있다. 좌선이라는 수단을 써서 그것을 철저히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7. ‘선’은 심신일여(心身一如)의 대조화(大調和)다
‘선’은 심신일여의 대조화다. 그리고 무(無)다. 공(空)이다. 영(零)이다. 그리고 무한대(無限大)다. 신체와 정신과, 나와 다른 사람과, 시간과 공간과, 우주와 나가 완전히 융합한 대조화가 ‘선’이다.
‘선’은 심신일여의 대조화이기 때문에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이 대조화 속에서 솟아나는 위대한 힘이야말로 진정 신통력이라 말할 수 있다. 신통력이라 하는 말을 쓰면 우리들과 동떨어진 것이 되기 쉽지만 이 신통력은 평범에 철저한, 진실된 인간력으로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것이다. 아니,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력이 그대로 신통력이다.
‘선’이라는 것이 정신과 신체의 대조화의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면 ‘선’이 몸에 배게 하는 실제의 수단과 방법은 저절로 알게 된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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