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스님 법어/♣ 禪을 즐겨라

禪을 즐겨라 - "공안 통해 자아본체 확인해야"

아산 보문사 2016. 4. 24. 18:09

    "공안 통해 자아본체 확인해야"      

선을 즐겨라 - 제1편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선에 대한 인식(5)

 

심신일여의 대조화, 정신과 신체의 대조화란 말을 썼지만 원래 인간이란 존재는 신체와 정신이 혼연히 융합한 유기체(有機體)로서 정신과 신체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편의상 신체와 정신을 따로 떼어 두 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는 그렇게 보아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선’을 생각하는 이상 추상적으로 생각되는 신체라든가 정신이라든가 하는 것을 토대로 해서 생각한다면 ‘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반드시 인간 그 자체의 실체를 출발점으로 해서 생각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 그대로가 정신, 정신 그대로가 신체, 심신일여 자체에 근거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심신일여의 대조화가 선이며 ‘선’의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연다[開悟]는 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이 마음과 신체를 대조화의 상태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다. 정신과 신체를 완전히 융합조화시키는 것이다.

정신과 신체가 혼연히 융화된 것이 자아(自我)의 본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본존인 것이다. 이 자기 본체를 이끌어내어 자기 자신의 본존을 받드는 것을 선가에서는 ‘견성’이라고 표현한다. 견성이란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성을 확인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본성을 확인한다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심신일여의 자아의 본체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떤 작업에 의해 그 본존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사물을 추상적으로 또 분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리고 과학을 연구하는 데는 사물을 추상적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대단히 유용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분석적이고 추상적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방법과 병행해서 종합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물을 분석적 추상적으로 보는 것은 과학의 세계이며 사물을 종합적 구체적으로 보는 것은 종교의 세계다. 현대사회에서 문화의 세계는 주로 과학의 연구가 만들어 낸 것이다. 과학의 연구와 진보는 인간 세계를 시시각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자아의 본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방편으로서 과학적으로 사물을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일단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긍정하게 된다는 뜻이다.) 과학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태도를 부정하기 위해서 선가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 ‘좌선’과 ‘공안’ 두 가지다. 좌선을 통해 신심의 조화가 얻어지면 자연히 자아의 본체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안에 의해 최후에 자아의 본존에 육박하게 된다. 이를 위해 쓰이는 대표적인 공안이 ‘무(無)’와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무’에 의해 일체의 과학적인 것을 부정해 실체의 세계를 발견하고, ‘본래면목’에 의해 자아의 주위에 굳게 붙어 있던 비자아적인 모든 것을 털어 없애고 실체의 자아를 발견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좌선이다.

  
▲ 삽화=강병호 화백


8. 초보자에게 권하는 좌선법

‘어떻게 앉느냐’가 중요
생리적으로 무리 없고
절대 넘어지지 않아야

좌법(坐法)은 단순히 앉는 자세가 아니다. ‘어떻게 앉느냐’는 선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종착점이기도 하다. 앉는 자세의 좋고 나쁨은 좌선에 큰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수많은 선학자들에 의해 좌법이 연구돼 왔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의 몸에 가장 알맞는 자세로 앉는 것이 최선이다. 물리적으로 가장 안정된 자세로 앉는 것이 생리적으로도 가장 무리가 없는, 가장 자연스러운, 가장 안락한 자세다. 처음엔 고행(苦行)처럼 느껴지는 좌선이지만 차차 적응하여 익숙해지면 조금도 힘들거나 피곤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앉고 싶어서 견딜 수 없게 된다. 한번 앉으면 그 자리를 풀고 싶지 않고 언제까지나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가장 바르고 안정된 자세로 앉으면 앞에서 밀든 뒤에서 밀든 어지간해서는 넘어지지 않는다. 마치 태산같이 묵직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부터 많은 선사들은 앉은 그대로 열반에 들었다[坐脫立亡]고 한다. 좌탈입망은 좌선에 철저했던 선사들이 좌선의 참맛을 만끽한 흔적이다.

이처럼 좌선하는데 가장 좋은 자세는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춰도 넘어지지 않는 자세다. 숨이 끊어져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적 안정을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이 절대 안정의 상태에서는 신체와 정신의 기능이 최고조로 발휘된다. 그 절대 기능의 발현이 ‘깨달음’이다. 그 절대 기능이 발현했을 때 ‘견성’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절대신(絶對身)’에서 ‘절대심(絶對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또 ‘상대아(相對我)’를 초월하여 ‘절대아(絶對我)’에 서는 것이다. 항상 ‘절대아’ 위에 서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선 수행자의 생활이다. 그것이 선가의 이른바 ‘정념상속(正念相續)’이다. 이 경지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곤란하다. 옛사람이 ‘탈락신심 신심탈락(脫落身心 身心脫落)’이라 말했는데 정말 그 말대로다. ‘절대아’ 위에 서있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속박 받지 않는다. 절대 자유인인 것이다. 복잡다단한 인생사를 쾌도로 난마를 자르는 것처럼 처리할 수 있는 경지다.

‘절대아’를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절대신’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숨이 끊어져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절대 안정의 좌상을 필요로 한다. 발의 교차, 무릎의 간격, 손을 잡는 방법, 호흡하는 방법 등 절대 안정의 좌상은 옛 선사들이 모두 연구해 놓았다.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의 공부가 필요하다. 스스로 연구하지 않고서는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선가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좌선의 방법은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결가부좌(結跏趺坐)다. 오른쪽 다리를 왼쪽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왼쪽 다리를 오른 쪽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손은 오른 손을 밑에 하고 왼손을 위에 얹으면서 엄지 손가락을 살며시 맞댄다. 등뼈는 똑바로 수직으로 세운다. 이렇게 허리를 곧게 세운 채 턱을 약간 끌어당기고 입을 가볍게 하여 아래 위의 이를 지긋이 맞춘다. 혀를 입천장에 대고 조용히 눈을 가늘게 내리뜬다. 이것이 선가의 좌선자세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