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스님 법어/♣ 禪을 즐겨라

禪을 즐겨라 - 일상생활에 禪 반영해야

아산 보문사 2016. 4. 18. 15:03

 일상생활에 禪 반영해야

 

선을 즐겨라 - 제1편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선에 대한 인식(3)

 

 발상의 전환 등 패러독스
 마케팅 · 기술 등에도 적용
 인생관 확립 길 선에 있어
 절대의 세계로 가는 첩경

 

4. 선의 네가지 특질

선사상은 주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로 표현된다.

첫째, 불립문자란 언어와 글로써는 세울 수 없는 경지를 이름이니, 철학적으로 말하면 개념적 지혜와 학식이 끊어진 데에 서 있다. 유(有)니 무(無)니 따위의 논리적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만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 개념에 묶여서도 안 된다.

둘째, 교외별전이란 교리 이외에 별도로 전승되어 온 진리가 있다는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 마하가섭 존자에게 당신의 정법안장을 전하면서 따로 은밀히 이 진리를 부촉했다는 일화에서 전해진다. 모든 종교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학이 형성된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한 경전에 속박되는 것을 경계한다. 이 말은 어느 경전이라도 수용돼야 한다는 의미를 안고 있거니와 한 경전에 속박되지 말 것을 타이르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셋째, 직지인심이란 인간의 본디 마음은 청정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이다. 인간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고운 것을 비추면 고운 것이 비치고, 더러운 것을 비추면 더러운 것이 비친다. 그러나 더러운 것이 비쳤다고 거울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운 것이 비쳤다고 거울의 가치가 올라가지도 않는다. 이러한 상태를 반야심경에서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위상이다.

넷째, 견성성불이란 본래부터 우리가 지니고 있는 미완(未完)의 여래(如來), 즉 불성을 발견해 낸다는 뜻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4에 나타나는 운거지(雲居智)선사의 말을 살펴보자.

“묻기를, 견성성불이란 어떤 뜻입니까? 큰스님이 대답하기를, 청정한 성(性)은 본디부터 가득 차고,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한다. 유무(有無)·정예(淨穢)·장단(長短)·취사(取捨)에 속하지 아니하고, 체(體)는 스스로 움직임이 빠르다. 이와 같이 명확하게 보는 것을 견성이라 한다. 성은 곧 부처님, 부처님은 곧 성이다. 그러므로 ‘견성성불’이라 한다.”

이러한 네가지 특질을 앞세우고 출범한 선종은 중국불교의 주류가 되었으며 이 전통은 아직도 우리 한국불교인 조계종에 그대로 반영되어 전해지고 있다.

5. 선은 생활에 있다

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일상생활 자체가 곧 선이라는 얘기다.

선과 생활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백장선사다. 중국 당나라 때의 백장선사는 백 살이 넘는 연로한 나이에도 매일같이 농사일을 했다. 괭이를 들고 밭을 가는 가하면 낫으로 풀을 베기 일쑤였다. 연로한 몸으로 매일같이 농기구를 드는 스승이 염려되어 제자들이 하루는 농기구를 모두 감추어 버렸다. 그런데 백장선사는 공양시간에 수저를 들지 않았다. 곡기 먹기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제자들이 연유를 묻자 저 유명한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란 말을 꺼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삽화=강병호 화백


원시불교 교단에서는 출가자들의 경작행위를 금지했었다. 모든 출가자들은 탁발을 통하여 음식을 조달했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은 출가자의 수행을 논밭을 경작하는 일보다 더 수승한 일로 강조하셨다. 이같은 출가자의 전통은 중국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그러다가 백장선사 시대에 이처럼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새로운 출가전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당시 중국의 대중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중국에서는 불교의 수행자를 무위도식하는 류로 취급하여 비난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따라 좌선 위주의 선이 생활 선으로 탈바꿈되는 일대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선은 백장선사 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선이 갖고 있는 의식과 정신에는 발상의 전환 등 일종의 패러독스[역설]가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생활 뿐 아니라 일상의 마케팅, 기술개발, 교육 등에도 선 정신이 닿아있다.

그러나 선은 어찌 됐든 좌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생활 속의 좌선인 것이다. 좌선이 없는 종교는 궁극적인 목표에 이를 수 없다. 좌선이 있는 종교는 이른바 선종이다. 선종에도 여러 종파가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종파라 할지라도 좌선을 유일한 방법으로 채택해 인생을 창조하고자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선의 본질은 좌선에 있다. 실제로 좌선을 하지 않고서는 선 자체를 몸에 배게 할 수는 없다. 좌선을 통해서만 자기 천부의 자성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좌선을 함으로써 진실하면서 원만한 자유인이 될 수 있으며, 풍부한 인간력을 몸에 배게 할 수 있다. 또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고 후회 없는 사랑을 이룰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좌선은 세계관과 인생관을 확립하는 ‘길’이다. 좌선은 ‘진여(眞如)의 세계’로 통하는 대도(大道)다. 좌선은 ‘무한대의 세계’ ‘영(靈)의 세계’ ‘절대의 세계’로 통하는 첩경인 것이다.

6. 선은 체득이다

선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다. 직접 몸으로 경험함으로써 체득하는 것이다. ‘선’은 생각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철두철미 자기 자신의 체험이다. 이것을 앞에서 간략하게 표현했지만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