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담금질로 자기 완성
선을 즐겨라 - 제1편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선에 대한 인식(6)
예를 들어 방석 하나를 생각해보자. 방석쯤이야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좌선할 때 깔고 앉는 방석의 뒷부분 두께는 매우 중요하다. 체격이나 골격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다. 이른바 개인차다. 이 개인차를 무시하고는 아무리 좌상(坐像)을 연구해도 절대 안정의 좌상을 이룰 수 없다. 일반 가정에서 앉을 경우 방석 위에 다른 한 장의 방석을 둘로 접어 후반부에 얹어 놓고 그 위에 앉는다. 이렇게 하면 등뼈의 끝 부분과 양쪽 무릎의 세 곳으로 전신의 무게를 나누어 받게 된다. 엉덩이 밑의 방석 두께가 모자랄 경우 다시 다른 한 장의 방석의 모서리를 엉덩이 밑에 넣는다. 그래도 또 모자랄 때는 삼각형으로 접은 두 겹의 모서리를 쓰면 된다. 방석의 두께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에 잘 맞도록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연구해 가면 자신의 신체에 가장 적합한 좌상, 즉 절대아가 발현되는 절대좌(絶對坐)를 찾아낼 수 있다.
‘선’을 체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좌선이다. 이 밖에 다른 길은 없다. 그리고 좌선을 하는 데는 신체의 절대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 절대좌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절대의 좌에 올려놓고 아랫배에 힘을 넣어 딱 버티어 앉는 것이 좌선의 가장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선의 참된 힘’, 이른바 선정력(禪定力)이 나오지 않는다.
현대 의학의 연구에 의하면 아랫배에 힘을 넣어 복압(腹壓)을 더하면 자율신경의 기능이 강해져서 내분비선과 여러 내장기관의 기능을 왕성하게 하여 자연히 심신 양면의 건강이 증진된다고 한다. 좌선의 긍정적 기능은 물론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의학계의 보고에 따른다면 좌선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나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주위 사람에게도 적극 권장할 일이다.
▲ 삽화=강병호 화백 |
9. ‘선’은 부단한 단련이다
옛날에는 교육에서 단련을 매우 존중했었다. 단련의 원래 뜻은 금속을 불에 달구어 두드린다는 것이다. 그것기 어의(語意)가 전이되어 학문이나 예술 등을 갈고 닦는다든지 수양 또는 수행을 거듭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금강석도 다듬지 않고서는 보석으로 태어날 수 없다. 정제의 과정을 거쳐 보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가치가 높은 것이다. 얼마나 부단히 갈고 닦아야 그 정도에 따라 얼마나 찬란히 빛나는 보석이 되느냐가 결정된다.
훌륭한 구슬이 될 때까지
계속해 닦고 또 닦아야
견성은 단련의 성과물
풀무질 많아야 수행 빛나
‘선’의 수행도 이와 똑같다. 선에 처음 입문하는 초보자는 일상의 삶에 맞춰 살다보니 흥미 없거나 단조로운 일에 대해선 쉽게 포기하는 일이 많다. 좌선이란 어찌 보면 매우 단조롭고 흥미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단조로운 좌선에서 자기 자신을 담금질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완전한 자기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선’이다. ‘선’은 정신과 신체를 모두 완전한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수단이자 방법인 것이다.
‘선’은 이른바 ‘전(全)’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 훌륭한 구슬이 될 때까지 닦고 또 닦아서 완전한 인간생활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계속한다. 그 외에 따로 ‘선’의 목적은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선’의 수행은 단련도이며 수련도다. 옛사람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이라는 일대사를 이룬 것도 다름 아닌 단련의 성과였다. 금속을 단련할 때는 단련하고자 하는 금속을 먼저 불 속에 넣고 뻘겋게 달구어질 때까지 풀무질을 한다. 충분히 달구어지면 이를 꺼내 망치로 두들겨 쇠똥을 빼낸다. 한참동안 단련한 다음 쇠가 식으면 다시 풀무질을 해서 달군다. 이렇게 몇 번 되풀이해야 비로소 원하는 훌륭한 금속이 만들어진다. 되풀이하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양질의 금속이 된다.
‘선’의 수행은 옛날부터 이 단련에 비유되었다. 선사들이 제자를 단련하는 수단이 금속을 단련하는 작업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는 것을 ‘풀무에 들어간다’는 말로 비유하기도 한다. ‘무딘 도끼를 풀무에 넣어 엄하게 망치질해서 태아(太阿; 중국 고대의 명검 이름)를 만들다’라는 말이 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선’의 수행은 스승과 제자의 열렬한 단련의 결과, 훌륭한 칼을 창작하는 작업과 맥을 같이 한다. 견성은 스승의 광대무변한 자비심과 제자의 타는 듯한 구도정신이 서로 맞닿아 완성되는 것이다. 스승의 친절한 자비심은 필요에 따라 열갈(熱喝)도 되며, 때로는 진권(瞋拳)도 되고 때로는 통방(痛棒)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진정으로 바침 위에 눕혀 놓은 열철(熱鐵)을 두들겨 내리치는 대철퇴(大鐵槌)인 것이다.
“아침에 성낸 주먹[瞋拳]을 먹고 저녁에 심한 꾸중[熱喝]을 듣다”라는 선어가 있는데 이는 모두 친절한 스승과 구도심에 불타는 제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단련의 작업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선’의 이 단련은 스승과 제자의 열렬한 합의에 의한 작업으로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자의 각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스승이 아무리 참고 노력해도 제자가 미적미적하거나 열의가 없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선’의 수행은 비장한 각오와 좌절하지 않는 끈기가 생명이다. 유교 경전인 《중용》에 의하면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백 번 한다. 다른 사람 열 번해서 그것을 하였다면 나는 그것을 천 번 한다.”는 가르침이 있다. 이 말은 곧 단련을 뜻하는 것이다.
‘선’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기초 위에 서서 부단한 단련에 의해 즐거운 인생을 창조해 가는 데 목적이 있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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