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배우기/♣ 법문

무상(無常)이란? [무상은 불교의 인생관] (4월 보름 )

아산 보문사 2017. 5. 10. 15:02

무상(無常)이란? [무상은 불교의 인생관]


'무상(無常)'이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항상 하는 것이 없다.' 즉 '고정 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말로써, 이세상의 모든 것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자꾸자꾸 변해간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제해무상(諸行無常)'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제행'이란 모든 현상세계를 말합니다. 젊은이는 늙은이가 되고, 봄의 푸른 입이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이렇게 모든 만물은 변해 갑니다. 만물은 살아 있으며 항상 활동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다 하는 것은 변화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무상'의 원리는 바로 이 '변화'를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변화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죽음일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상태로 말한다면, 삶은 활동하는 모습니고, 죽음은 정지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활동하고 있는 것과 정지하고 있는 것을 생물과 무생물의 그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돌이나 흙이 정지된 듯 보이지만 실은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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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호흡을 하고 육체를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기가 되면 호흡하지 않고 맥박도 뛰지 않으며 육체 또한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었다고 해서 활동이 정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활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외형적으로는 입도 손도 발도 움직이지 않게 되지만 이 삼일 방치해 두면 차음 육체는 썩어갑니다. 썩어간다고 하는 것 역시 육체가 변화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구더기가 나오고 진물이 나오는 것도 모두 변화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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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물, 특히 우리들 인간은 그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집착, 즉 지금 이대로 있고 싶고 변화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 즉, 죽음에서 비롯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깨달음의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사를 해탈하는 것, 이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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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두려워하여 사()라고 하는 말을 입에 담기 싫어합니다. 심지어는 숫자4를 싫어하여 의도적으로 4가 들어가는 번호조차 피합니다. 말하자면 4라는 이미지로 4()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이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만약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인구과다가 되어 곤란할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신진대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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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하데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여기에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변화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이 삶은 너무나 권태롭고 지겨울 것입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나면 이별을 아쉬워하게 되지만, 아쉬움을 두고 헤어짐으로써 다음 만남을 더욱 기대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변화가 현재를 더욱 소중하게 만들고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죽음이라는 변화가 있어 싫어하기 보다는 오히려 고마워해야 되지 않을까요.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더욱 귀중한 줄을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삶을 결코 헛되게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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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이 태어나려면 응당 부모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지구상의 무수한 인간 가운데서 우리 부모 두 사람이 만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어렵게 만난 두 사람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기까지는 생물학적 확률로 보더라도 매우 희박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정말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존재가 병이 들어 1, 혹은 반 년 정도 밖에 못 사는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고 한다면, 아마 누구라도 일 분 일 초가 아까워 지금까지 헛되게 보낸 삶을 후회하고, 남은 인생이나마 보람 있는 삶을 보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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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시한부 인생은 반드시 불치의 병을 선고받은 환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향한 시한부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 기간이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찌 이 삶을 그냥 헛되니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는 무상의 가르침에 의해 죽음이 있으니까 삶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이 삶을 더욱 진취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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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설명했듯이 죽음이란 인간이 겪는 여러 변화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 죽음을 싫어한다는 것은, 즉 변화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는 인간세계의 한 모습이며 죽음 또한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생활의 전제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 불교의 정토사상에서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대 전환이 일어나 고통스러운 이 세계가 살기 좋고 즐거운 세상으로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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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죽는다고 하지 않고 왕생한다. , 정토에 태어난다고 하여 왕생정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교의 신념에 따르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집니다. 만물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지 못하게 무리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삶의 한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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