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스님 법어/♣ 禪을 즐겨라

禪을 즐겨라 - 혜가에게 '안심법문' 선풍 떨쳐

아산 보문사 2016. 7. 16. 06:45

혜가에게 '안심법문' 선풍 떨쳐

선을 즐겨라 ⑭-제2편 선승과 공안

 

 

장차 바른 선지(禪旨)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달마는 깊이 생각한 끝에 아무도 모르게 양나라 북쪽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로 가게 된다. 달마는 그 곳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 벽을 향해 앉았다. 그리곤 선의 깊은 뜻을 전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길 기다렸다. 이것이 이른바 달마의 면벽 9년의 좌선이다. 효명황제(孝明皇帝)가 삼도사(三度使)를 보내 달마를 모셔오려 했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다. 달마의 이런 행태에 대해 당시 중국인들은 ‘벽관바라문(壁觀波羅門)’이라며 비웃었다.

이런 달마의 앞에 신광(神光)이 나타난다. 신광은 여러 가지 학문을 공부했으나 만족할만한 경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남천축에서 온 고승이 소림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러나 입문을 거절당한 채 하루 밤을 밖에서 지새야 했다.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신광의 무릎을 덮었다. 이튿날 아침 달마는 눈 속에 서 있는 신광을 보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어"
 "내가 이미 마음 안심케 해"

“그대 눈 속에 서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달마의 자상한 목소리를 듣고 신광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바라옵건대 화상의 자비한 마음으로 널리 군품(群品)을 제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법의 현묘한 도리는 광겁에 걸쳐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는다. 하물며 조그마한 도리와 지혜로 어찌 진승(眞乘)을 얻겠는가?”
신광은 달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리의 칼을 뽑아 자기의 왼 팔을 잘라 달마 앞에 내놓았다. 신광의 구도심이 치열함을 확인한 달마는 비로소 입문을 허락했다. 제자로 받아들이곤 혜가(慧可)라 이름했다.
혜가는 스승에게 제불의 법인(法印)을 구할 작정으로 말했다.
“저의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부디 이 마음을 안심케 하여 주십시오.”
“그래, 그러면 그 마음을 가져 오너라. 내가 너를 위해 안심케 해주겠다.”
혜가는 이로부터 아침저녁으로 장작과 물을 나르며 한 순간도 자신의 마음을 찾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날마다 정진을 거듭한 혜가는 어느 날 스승에게 가르침을 재차 구했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이미 마음을 안심케 해 마쳤느니라.”
이 순간 혜가는 ‘안심법문’의 현묘한 도리를 깨달았다.

  
▲ 삽화=강병호 화백


달마가 말년에 법을 전할 사람을 선정하기 위해 제자들의 견해를 듣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자 도부(道副)가 나서 말했다.
“내 소견으로는 문자를 취하지 않고, 문자를 떠나지 않는 것을 도용(道用)으로 삼겠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그대는 나의 껍질을 얻었다.”
니총지(尼總持)가 답했다.
“내가 해석하건대 경희의 아촉불국을 본 것과 같이 한 번 보고 다시 보지 않겠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그대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사대는 원래 공이며 오음 또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나의 견처(見處)는 일법(一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나의 뼈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견해를 말해야 할 차례가 된 혜가는 예배할 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물러나 묵묵히 서 있었다. 이것을 보고 달마가 말했다.
“그대는 나의 중심[髓]을 얻었다. 과거 여래의 정법안장이 가섭대사에게 전해진 이래 전전해서 나에게 왔다. 이를 그대에게 부법(付法)한다. 당연히 호지(護持)할지어다. 또한 그대에게 가사를 주어 그것으로 법신(法信)을 삼는다. 각기 나타내는 바 있으니 모름지기 잘 알지어다.”

달마가 혜가에게 준 전법의 게는 이렇다.
아본래자토(我本來玆土)/전법구미정(傳法救迷情)/일화개오엽(一華開五葉)/결과자연성(結果自然成)

달마는 또 《능가경》4권을 함께 전해 주었다고도 한다. 이로써 혜가는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되었다.

혜가에게 전법한 달마는 숭산을 내려와 우문(禹門)의 천성사에 머물면서 태수 양현지(揚衒之)등 인연있는 선비를 교화하는 등 현풍(玄風)을 크게 떨쳤다. 이렇듯 선풍이 크게 일자 교종의 광통율사(光統律師)와 보리류지삼장(菩提流志三藏)등이 이에 자극받아 달마와 대론(對論)하였으나 번번이 한계에 부닥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달마의 예리한 선검을 두려워 한 이들은 비열하게도 달마의 독살을 꾀하게 됐다. 결국 달마는 그들이 여섯 번이나 독살을 시도한 끝에 서거(逝去)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단좌한 채로 입적했으니 위의 장제(莊帝) 영안 원년(永安 元年) 10월 5일이었다. 동년 12월 28일 웅이산(熊耳山)의 정림사(定林寺)에서 영결식이 거행됐으며 소림사에 탑이 세워졌다.

그런데 달마가 입적한 후 3년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위나라 스님 송운(宋雲)이 서역에서 돌아오는 길에 히말라야의 산길에서 달마가 손에 한 켤레의 짚신을 들고 인도로 돌아가는데 만났다. 송운은 귀국해서 달마의 입적 소식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한 나머지 히말라야의 산길에서 만났던 사실을 고백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웅이산에 장사 지낸 달마의 무덤을 열어보기로 했다. 관 속에는 유골은 보이지 않고 오직 한 켤레의 짚신만이 놓여있었다. 이를 사람들은 달마의 신이함이 빚어 낸 불가사의로 받아들였다. 양 무제는 이러한 달마를 높이 추모하여 비를 세우고 손수 비문을 작성했다.

“아아, 이것을 보고도 보지 않고, 이것과 만나고(逢)도 만나지 않고, 이것을 대접(遇)하고도 대접하지 않으며 예나 지금이나 이것을 원망하고 한탄한다. 운운”

또 당나라 대종황제는 원각대사(圓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달마의 법사(法嗣)에는 혜가 이외에 도부 도유 니총지등이 있었다. 저술로는 《대승입도사행(大乘入道四行)》《안심법문(安心法門)》《소실육문(小實六門)》등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과연 달마의 저술인지는 분명치 않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