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을 잘라 바치자 마침내 면알
선을 즐겨라 ⑮-제2편 선승과 공안
성체제일의(聖諦第一義) [무제문달마 武帝問達磨]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근본이 되는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마가 말했다.
“텅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무제가 다시 묻는다.
“나와 마주한 그대는 누구입니까?”
“모릅니다.”
무제가 이를 깨닫지 못했다. 달마는 마침내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다. 무제는 뒤에 지공(志公)에게 물으니 지공이 말했다.
“폐하, 이 사람을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이는 관음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분이십니다.”
무제가 후회하고 곧 사신을 보내 달마를 다시 청하고자 했으나 지공이 말했다.
“폐하, 사신을 보내어 다시 모셔오려 하지 마십시오. 온 나라 사람을 다 보낸다 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벽암록》 제1 《종용록》 제2
달마안심
달마가 면벽하고 있는데 2조가 눈 속에 서서 팔을 자르고 말했다.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바라건대 스승님께서 저의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
달마가 말했다.
“그대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땅히 마음을 편케 해주겠노라.”
2조가 말했다.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이미 그대의 마음을 편케 했노라.” 《무문관》 제41
12. 신광혜가(神光慧可 482∼593)
2조 혜가대사는 낙양무뢰(洛陽武牢) 사람으로 속성은 희(姬)씨다. 아명은 신광.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내외의 전적(典籍)에 막힘이 없었다. 그러다 낙양 용문(龍門)에 가서 보정(寶靜)선사를 따라 출가해 영목사(永穆寺)에서 수구(受具)했다. 이후 여러 선지식을 찾아 참방하며 공부하다 32세때 다시 향산으로 돌아왔다. 향산에서 정주(定住)하며 공부하기 8년, 북위 정광 원년 40세에 선정 속에 들었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한 신인(神人)의 말을 듣고 숭산의 소림사로 찾아가 달마대사를 배알하게 된다. 때는 12월 9일. 쌓인 눈이 허리까지 잠겼는데도 달마는 방에 들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혜가는 여기에서 스스로 왼 팔을 잘라 달마에게 바치며 불타는 구도심을 보이자, 마침내 면알(面謁)을 허락받았다.
달마의 곁에서 시봉하기를 6년, 모든 신고(辛苦)를 다하고 이윽고 심인(心印)을 전수받아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되었다. 북제 천보(北齊 天保)3년에 법을 제자 승찬(僧燦)에게 내려주고 위나라의 업도(鄴都)로 가서 34년 동안 전법 도생했다. 혜가는 또 당대의 대강백 변화법사가 《열반경》을 강하던 광구사(匡救寺)로 가서 법문하니 법사의 강석이 텅 비었다. 날로 혜가의 현풍이 기세를 올리자 법사가 고을 재상 적중간(翟仲侃)에게 무고했고 곧이 들은 재상이 혜가에게 형을 집행, 입적했다. 수나라 개황(開皇) 13년 3월 16일의 일로 혜가의 세수 107세였다. 당태조는 정종보각대사(正宗普覺大師)란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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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강병호 화백 |
13. 부대사(傅大士 497∼569)
부대사는 절강성 동양(東陽)의 오상현(烏傷縣) 사람으로 성은 부(傅)이고 이름은 흡(翕), 자(字)는 현풍(玄風)이다. 남제(南齊)의 건무 원년(서기 497년)에 태어났다. 다른 선사들과는 달리 머리를 깎지 않고 세속에 몸을 의탁하며 선풍을 진작한 유발(有髮) 도사로 성을 따서 부대사라 하기도 하고 출생지를 따 ‘동양대사’라고도 했다. 또 ‘쌍림대사’라 불렸으며 스스로는 ‘선혜(善慧)대사’라 했다.
대사란 보살의 또 다른 호칭
세속 선풍진작 부대사 유명
불교에서의 대사(大士)는 보살의 또 다른 칭호다. 16세 때 유(劉)씨 집 딸 묘광(妙光)을 얻어 장가들고 보건(普建)과 보성(普成) 두 아들을 얻었다. 24세가 되어 송산(松山)에 숨어 수도하는 한편 산밑에 쌍림사(雙林寺)를 세워 사경(寫經)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경목(經目)이 많아 사경에 불편한 점을 느끼고 경을 수록하는 윤장(輪藏)을 만든 것은 유명하다. 윤장은 하나의 기둥에 여덟 개의 면을 만들어 쉽게 골라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훗날 경장에 부대사의 형상을 안치하고 양쪽에 보건 보성의 두 동자로 하여금 부대사를 모시는 형태를 띠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연유다.
부대사는 무제에게 하화중생의 뜻을 받드는 표를 만들어 주문(奏聞)했다. 그러나 표 가운데 ‘쌍림수하당래해탈선혜대사(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師) 국왕구세보살(國王救世菩薩) 말씀올리다’의 문구가 있었다. 관리는 군신의 예를 무시한 표백문이라 해서 무제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공(志公)의 천거에 따라 무제의 부름을 받게 돼 《금강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처음엔 동안사에 있다가 뒤에 정림사로 옮겨 지내던 중 대건 원년 4월 24일 입적했다. 이때 대사의 나이 73세였다. 유저로는 《선혜대사록》1권과 《심왕명(心王銘)》이 전하고 있다. 심왕명은 4음(四音)의 언문으로 선문게송의 기묘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부대사강경경(傅大士講經竟)
양무제가 부대사를 초청해 《금강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부대사가 법좌 위에서 경상을 한 번 후려치고 바로 자리에서 내려와 버리자, 무제는 깜짝 놀랐다. 이에 지공스님이 물었다.
“폐하께서는 이를 아시겠는지요?”
“모르겠습니다.”
“부대사는 금강경 강의를 마쳤습니다.” 《벽암록》 제67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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