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스님 법어/♣ 禪을 즐겨라

禪을 즐겨라 - 제방돌며 설법교화 일상사 삼아

아산 보문사 2017. 1. 4. 11:38

제방돌며 설법교화 일상사 삼아

선을 즐겨라 34-제2편 선승과 공안


 "남전의 법 이었습니까?"
 "진주에 큰 무가 난다지?"

조주사문(趙州四門) [조주동서남북 趙州東西南北]
어느 날 한 스님이 조주성 관음원의 조주화상을 찾아와 물었다. “조주, 조주하는데 조주란 본래 어떤 겁니까?” 이에 조주화상은 “조주에는 동문도 있고 서문도 있고 남문도 있으며 북문도 있지.”하고 대답했다. 《벽암록》 제9

조주세발(趙州洗鉢)
조주에게 한 스님이 말하되 “제가 갖 총림에 들어왔아오니 바라옵건대 화상께서는 지시해 주시옵소서.” 조주화상께서 이르시되 “죽을 먹었느냐, 아직 아니 먹었느냐?” 스님이 말하길 “죽은 다 먹었습니다.”하였다. 화상이 이르시되 “그러면 밥그릇을 씻어라.”하셨다. 이 말에 그 스님은 깨달음이 있었다. 《무문관》 제7 《종용록》 제39

조주대라복두(趙州大蘿蔔頭)
어느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묻되 “소문에 듣기로 화상께선 저 유명한 남전화상을 친히 모시고 배우면서 그 법을 이었다 하는데 과연 그러합니까?” 그러자 조주화상이 “진주(鎭州)에는 꽤 큰 무가 난다지?”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벽암록》 제30

조주대사저(趙州大死底) [조주문사 趙州問死]
조주화상이 투자화상에게 물었다. “아주 죽어버린 자가 다시 갑자기 살아난다면 어떻게 하겠소?” 이에 투자화상이 “밤에 쏘다니면 안 되지. 내일 다시 오게나.”하고 응대했다. 《종용록》 제63 《벽암록》 제41

조주 도려도마(渡驢渡馬) [조주석교약작 趙州石橋略彴]
한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물었다. “오래전부터 조주의 돌다리가 유명하다기에 막상 와보니 그저 간단한 외나무 다리가 아닙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너는 간단한 외나무 다리만 보고 돌다리를 보지 못하느냐?” 그러자 그 스님이 다시 “그 돌다리란 어떤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조주화상은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가지.”하고 말했다. 《벽암록》 제52

  
▲ 삽화=강병호 화백


조주전사노(趙州田厙奴) [조주지도무난 趙州至道無難]
한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물었다. “지극한 도란 어렵지 않다. 다만 분별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그 분별이 없어야 한다는 건 뭡니까?” 이에 조주화상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대답했다. 그 스님이 다시 “그것도 분별 아닙니까?”하고 따지자 조주화상은 “이 촌놈아, 어디에 분별이 있느냐?”하고 크게 꾸짖었다. 얼이 빠진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자코 있었다. 《벽암록》 제57

조주분소불하(趙州分疎不下)
한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有嫌揀擇)이라고 곧잘 말씀하시는데 그건 스님이 좋아하는 소굴(巢窟)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 조주화상은 “한 5년전에도 같은 질문을 받았지만 아직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는지 모르겠네.”고 답했다. 《벽암록》 제58

조주하불인진(趙州何不引盡) [조주유혐간택 趙州有嫌揀擇]
한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늘 입버릇처럼 지도무난 유혐간택이라 하시면서 우리가 뭐라고만 하면 그건 간택이네 분별이네 하고 꾸짖으시는데 그렇다면 스님께선 아무 말도 않고 어떻게 중생을 제도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조주화상은 “왜 말을 하다가 마느냐?”하고 받았다. 스님은 “저는 거기까지 밖에 외우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주화상은 “그렇다. 지도란 어렵지 않다. 다만 분별심이 없어야 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벽암록》 제59

조주삼전어(趙州三轉語)
어느 날 조주화상은 수행자들에게 심기(心機)를 일전시킬 만한 한마디를 세 가지 수시(垂示)했다. 송(頌)으로 말씀하시기를

니불(泥佛)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
온천지 신광이건만 한밤 꼬박 눈 속일세
아, 누군들 흉내야 못 내랴.

금불(金佛)은 도가니를 건너지 못한다.
자호(紫胡)를 찾는 이들 ‘개조심’ 보았으리
아, 어딘들 밝은 바람 없으랴.

목불(木佛)은 불을 건너지 못한다.
생각하라, 파조타(破竈墮)의 번개같은 지팡이
아, 이젠 나를 찾았어라! 《벽암록》 제96

41. 장사경잠(長沙景岑 ?~? 南嶽下)

호남장사(湖南長沙)의 경잠선사(景岑禪師)는 어릴 적에 출가, 남전보원선사를 따라 오랫동안 참구한 끝에 일대사를 밝히고 그 법을 이었다. 처음엔 녹원(鹿苑)에 살면서 제 1세가 되었으나 그 후 일정한 거처 없이 제방을 두루 돌며 인연 있는 곳에서 설법교화하는 것을 일상사로 삼았다. 말년엔 동정호 남쪽의 장사산에 있으면서 크게 선풍을 떨쳤다. 기봉민첩(機鋒敏捷)하고 총림외경(叢林畏敬)하여 '잠대충(岑大蟲 범을 의미함)'이라 불렸다. 초현대사(招賢大師)라고도 한다.
그의 입멸한 시기와 세수 또한 분명치 않다.
선사는 어느 날 상당해서 말했다.
"내 만약 앞으로 종승(宗乘)을 떨치게 된다면 법당 안에는 모름지기 풀이 한 길이나 될 것이다. 내 할 수 없이 여러 사람에게 말한다. 진시방세계(盡十方世界)는 사문의 눈, 진시방세계는 사문의 몸, 진시방세계는 자신의 광명, 진시방세계는 자신의 광명 속에 있고 진시방세계는 자신 아닌 것이 없다. 내 항상 그대들 여러 사람에게 말한다. 삼세의 제불 법계의 중생은 마하반야의 빛이 있다. 빛이 나지 않을 때는 그대들 어디론가 향하여 무엇에 의탁한다. 빛이 나지 않을 때는 여전히 부처가 없고 중생의 소식도 없다. 어느 곳에선가 산하국토를 얻게 되리라."
선사는 학인을 대함에 있어서 항상 게를 쓰는 버릇이 있었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