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스님 법어/♣ 禪을 즐겨라

禪을 즐겨라 - 제자 앙산과 함께 위앙종 개산

아산 보문사 2016. 12. 9. 12:51

제자 앙산과 함께 위앙종 개산

선을 즐겨라 31-제2편 선승과 공안

 

 

황벽은 그 뒤 남전(南泉)과 염관(鹽官)을 연이어 뵙게 됐다. 남전과 염관은 같은 마조대사의 문하였기 때문에 백장과도 동학(同學)이다.
완릉(宛陵)의 지사(知事) 배상국(裵相國)은 황벽을 존경하는 세속의 벗이었다. 완릉에 큰 선원을 세워 황벽을 청해 설법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선원은 황벽과의 인연을 입어 개원사(開元寺)라 이름했다.
황벽의 문풍은 점점 융성해 갔고 선사의 용모를 흠숭하여 접득(接得)하려는 학인이 수천에 달했다. 선종황제 대중 4년(또는 3년, 9년이라고도 함)8월 황벽산에서 시적하니 단제선사(斷際禪師)란 시호가 내렸다. 남겨진 제자로는 임제의현이 가장 뛰어났으며 유교로는 《전심법요(傳心法要)》한 권이 있고 어록도 또한 세상에 나와 있다.

황벽당주조한(黃檗噇酒糟漢) [황벽주조 黃蘗酒糟]

어느날 황벽화상이 좌하의 선승들에게 일러 말했다.
"너희들 모두 술지게에나 취해 다니는 놈들이다. 하릴없이 이 절 저 절 다니니 어찌 오늘의 나같은 경지에 이르겠느냐. 아무리 찾아다녀도 이 대당국(大唐國)에는 올바른 선사가 없다는 걸 아느냐.“
이때 한 스님이 나와 대꾸했다.
“하지만 도처에서 가르치고 있는 선사가 많은데 그들은 뭡니까?”
그러자 황벽은 “선이 없다는 건 없다는 게 아니고 다만 없는 건 올바른 스승[禪師]뿐이다.”고 대답했다. 《벽암록》 제11 《종용록》 제53

39.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潙仰宗)
 
 백장이 사마두타에게 추천
 대위산 주인으로 명성 떨쳐

담주위산(潭州潙山)의 영우선사는 복주장계(福州長溪) 조(趙)씨의 아들이다. 당 대종황제 대력(大曆) 6년에 태어났다. 15세 때 출가하여 건선사(建善寺) 법상율사(法常律師)에 따라 축발(祝髮)했다. 그 뒤 항주의 용흥사에서 대소승의 교리를 연구하고 23세때 강서(江西)로 가서 백장회해선사 문하에 들어갔다.
백장은 영우를 얼핏 볼 뿐 곧 방에 들 것을 허락했다. 영우는 열심히 수행정진했고 이윽고 제자중의 수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백장에 시립(侍立)하고 있을 때 이와 같은 법거량이 있었다.
백장: 스승은 누구인가?
영우: 그 사람은 영우입니다.
백장: 화로 속에 불이 있는가, 어떤가?
영우:(화로 속을 뒤져보고)없습니다.
백장:(화로 속을 스스로 깊이 파헤쳐 아주 작은 불씨를 찾아내 영우에게 보여주며)이것은 무엇인가?
그 순간 영우는 크게 깨쳤다. 아주 평범한 계기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영우는 깨친 소견을 낱낱이 아뢰고 사례하였다. 그러나 백장은 영우의 깨친 소견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곤 말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불성을 보려 하거든 응당 시절 인연을 봐야 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미망을 깨닫는 것과 같이 또 잊어버린 것을 생각해낸 것과 같이 알게 되는 것이다. 일단 조사의 뜻을 깨닫게 되면 미처 깨닫지 못한 마음도 없고 법도 없는 것이다.”
스승의 친절한 가르침에 영우는 수업과 정진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백장의 법을 잇게 되었다.

  
▲ 삽화=강병호 화백


어느 날 백장에게 사마두타(司馬頭陀)라는 자가 찾아왔다. 그가 백장을 뵙고 말하길 “요즘 호남에 대위(大潙)라는 명산을 발견했는데 이 산에 사는 자는 1천5백 명의 제자를 거느릴 수 있는 기량있는 선지식이 아니면 안 됩니다. 화상의 문하에 그에 적절한 자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하였다. 백장이 “이 노승 같으면 어떠한가?”하니 사마두타는 “선사는 골인(骨人)인데 반하여 대위산은 육산(肉山)이라 맞지 않습니다.”하였다. 이에 백장은 당시 문하의 제1수좌에 있던 화림(華林)을 소개하였으나 사마두타는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전좌(典座)를 맡고 있는 영우를 추천하였는데 “이 사람이야말로 대위산의 주인이 될 만하다.”며 흡족해했다. 이에 따라 백장에게 청하여 영우와 함께 대위산으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제1좌에 있는 사람을 제치고 벌어지는 일이라서 불화가 예고되었다. 때문에 백장은 밤이 되는 것을 기다려 남몰래 영우를 불러 “그대 승지(勝地)의 위산에 가서 나의 종(宗)을 이어 널리 후학을 제접하라.”고 말하곤 사마두타와 함께 떠날 준비를 하게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화림이 불만을 표출하자 백장은 두 사람을 함께 불러 법력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 결과 영우가 합격해 위산으로 가게 된 것이다.
영우는 백장선사의 곁을 떠나 대위산으로 옮겼다. 그런데 5년이 지나고 7년이 되어도 누구 한 사람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이 대위산은 지형이 험준해 등산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우는 매일 원숭이를 벗하여 상수리 열매를 먹는 상태였다. 영우는 생각했다.
“원래 이 산으로 온 것은 정법을 넓히고 군생(群生)을 제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인적이 끊긴 이 산중에 그대로 있다간 천오백명은 고사하고 단 한 사람을 제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산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영우는 하산할 각오를 하곤 거처를 나섰다. 그런데 뱀과 호랑이, 늑대 표범 등이 나타나 영우의 발길을 막았다. 영우는 이들 짐승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 내 갈 길을 막지 말라. 나는 이 산에 인연이 없기 때문에 하산해서 다른 곳으로 가 살고자 한다. 그러나 진실로 나와 이 산이 인연 있다고 한다면 그대들 빨리 물러가라. 인연이 없는 것이라면 물러갈 것 없다. 나의 몸은 그대들의 먹이로 일임하겠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들 짐승은 사방으로 달아났다. 이때 선사는 대위산과 인연 있음을 생각하곤 재차 암자로 돌아와 때를 기다렸다. 이후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뢰안(賴安)이란 스님이 몇 명의 승려를 이끌고 영우를 찾아왔다. 그리고 스스로 전좌를 자임하며 선사를 돕게 되었다. 그로부터 산 밑의 주민들도 선사의 덕을 알고 흠모하여 그곳에 사찰을 짓곤 동경사(同慶寺)라 이름하였다. 이렇게 되니 사방에서 제방납자들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곧 대위산은 거대한 총림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선사가 제방학인을 제접할 때 앙산(仰山)을 얻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앙산 이외의 상대로는 향엄(香嚴) 유철마(劉鐵磨) 운암(雲巖)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과 거래한 법거량을 1칙씩 남겨두고 있다.
위산영우와 앙산과는 육친의 부자(父子)보다 더 친밀한 것이 있었다. 이것이 위산의 종풍을 위앙종(潙仰宗)으로 부르는 까닭이기도 하다.
선사는 대법을 선양하기를 40여년. 당 선종황제 대종 7년 정월 9일 몸을 깨끗이 하고 결가부좌해서 그대로 시적하였다. 세수 83세. 법랍 64세였다. 대원선사(大圓禪師)란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위산경책(潙山警策)》한 권이 있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