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스님 법어/♣ 禪을 즐겨라

禪을 즐겨라 - "생각해서 하면 이미 어긋난다"

아산 보문사 2016. 11. 3. 15:50

"생각해서 하면 이미 어긋난다"

선을 즐겨라 28-제2편 선승과 공안

 

 

유엄이 달을 보고 웃자
소리가 90리 밖까지 울려

마조선사를 모시길 3년, 이윽고 그 곁을 떠나 유엄은 다시 석두 회하(會下)로 돌아와 전심전력 수행을 쌓아 마침내 법을 잇게 된다. 그 후 다시 석두 곁을 떠나 예주의 약산에 살면서 유엄은 처음으로 법당(法幢)을 세웠다. 그러자 회하에 모여온 자 손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는 바 그 가운데서 운암(雲巖)과 도오(道吾) 두 사람이 특히 뛰어났다.
선사가 어느날 밤, 산에 올라가서 경행(經行)할 때의 일이다. 갑자기 구름이 걷히면서 달이 나타났다. 선사는 그 달을 바라보며 상찬(賞讚)하며 크게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예주의 동쪽 90리 밖에까지 울렸다 한다. 이 웃음소리를 들은 이(李)씨가 시(詩)를 지어 보내왔다.
“유거(幽居)를 고르게 되어 야정(野情)에 알았다. 말년에 보내는 것도 또 맞이한 것도 없다. 어느 때는 곧 고봉(孤峰)위에 올라 달 밑의 구름을 열고 소리지르기 일성(一聲)하노라”.
그는 당 태화(太和) 8년(834)11월에 입적하였다. 임종 직전에 “법당이 쓰러진다, 법당이 쓰러진다.”고 외치자 대중이 모두 놀라 기둥을 잡고 버티었다. 이를 보고 선사는 손을 흔들며 “그대들은 나의 뜻을 모른다.”고 말하곤 그대로 입적했다. 세수 84세. 당의 문종황제는 홍도대사(弘道大師)란 시호를 내렸다.

약산진중진(藥山塵中塵)

한 스님이 약산에게 묻는다.
“편전사의 들판에는 사슴과 고라니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중 사슴 중의 왕인 고라니를 쏘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약산이 “자, 화살을 보라. 쏘아 맞혔다.”고 대답하자 그 스님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화상이 시자에게 이르길 “이 죽은 자를 끌고 나가라.” 하자 쓰러졌던 스님이 곧 일어나 뛰어나갔다. 약산화상이 “저 엉터리같은 돌 중놈 같으니라구, 저런 걸 상대하다간 끝이 없지.”라고 말했다. 《벽암록》 제81

약산승좌(藥山陞座)

약산이 오랫동안 승좌하지 않았다. 원주(院主)가 말하길 “대중들이 오랫동안 시회(示誨)를 바라고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화상께서는 대중들을 위해 설법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듣고 약산이 종을 치게 하니 대중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약산은 승좌하여 한참만에 곧 자리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갔다. 원주가 뒤를 따르며 “화상께서는 마음 내키시는대로 대중을 위해 설법해주십시오. 왜 한마디 설법도 하지 않으십니까?” 하곤 물었다. 화상이 답했다. “원주야, 경에는 경사가 있고 논에는 논사가 있으며 율에는 율사가 있거늘 날더러 어찌하란 말이냐.” 《종용록》 제7

35. 용담숭신(龍潭崇信 ?∼? 靑原下)

용담(龍潭)의 숭신선사(崇信禪師)는 저궁(渚宮)사람이다. 그의 집은 형주 성동(城東)의 천황항(天皇巷)에 있으며 떡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 천황산에는 도오선사(道悟禪師)가 살고 있었다. 숭신은 날마다 떡 10개를 가지고 가서 도오화상에게 바쳤다. 화상은 그가 주는 떡을 늘 즐겁게 받았다. 그런데 언제나 한 개만을 남겨 그것을 숭신에게 돌려주며 “내가 그대에게 주어서 자손들에게 공덕을 쌓게 하노라.”하였다. 숭신은 “내가 가지고 온 떡을 한 개만을 돌려주는데는 무엇인가 특별한 까닭이 있는 것인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화상에게 물었다. “떡은 제가 지니고 왔는데 왜 제게 다시 돌려주십니까?” 화상이 말하길 “네가 가지고 온 것을 너에게 다시 돌려주는데 무엇이 이상한가.” 이에 숭신이 문득 현지(玄旨 현묘한 뜻)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화상을 따라 출가했다. 그 때 화상은 “그대 옛날에 복선(福善)을 소중[崇]히 하고 지금은 내 말을 믿는다[信]. 따라서 숭신이라 이름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이로부터 숭신은 도오선사의 좌우에서 일하면서 수행에 정진했다. 숭신과 도오선사 사이엔 이런 문답이 전해 온다.

  
▲ 삽화=강병호 화백


“제가 여기에 온 뒤로 여지껏 심요(心要)를 가르쳐 주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대 온 날로부터 설법하지 않은 적이 없다.”
“어디서 가르쳐 주셨습니까?”
“그대가 차를 끓여오면 나는 받았고, 밥을 갖다 주면 받아먹었으며, 인사를 하면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마음의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단 말인가.”
스승의 이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자 도오선사가 일갈했다.
“볼려면 당장 봐야지 생각해서 하면 벌써 어긋난다.”
스승의 말에 숭신은 한 점의 의심도 남기지 않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곤 어떻게 보임해야 할지 물었다. 스승 도오선사가 말했다.
“성품에 맡겨 자유롭게 하고 인연을 따라 걸림없이 할지언정 연에 따라 방광(放曠)해라. 오직 범심(凡心)을 다하면 따로이 성스런 견해가 없느니라.”
또 어느 날 숭신이 스승에게 물었다.
“종상상전(從上相傳)의 근본은 어떠합니까?”
“그대가 온 곳을 밝히지 않는다면 안 된다.”
“그러한 안목을 몇 사람이나 갖추고 있을까요?”
“들판에는 갈대가 자라기 쉽다.”
숭신은 뒤에 예양의 용담에 이르러 암자를 짓고 살았다. (예양은 호남성 동정호 서쪽 기슭에 있으며 남북시대에는 형주, 수나라 때는 예양, 당나라 때는 예주, 명나라 때는 풍주라 일컬어졌다.) 그의 생몰연대를 알 수 없는 게 아쉬움이다. 법사(法嗣)로는 덕산선감(德山宣鑒)선사가 있다.

구향용담(久響龍潭)

용담선사에게 어느 때 덕산이 청익(請益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하여 밤이 깊었다. 용담선사 말하길 “밤이 깊었는데 왜 물러나지 않는고?” 덕산이 드디어 진중(珍重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것)하고 발을 들고 나갔다 다시 들어와서 “밖이 캄캄하여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용담선사가 지촉(紙燭 기름종이를 말아 양초대신 사용한 것)에 불을 붙여 주었다. 덕산이 받으려고 할 찰나에 용담선사가 이를 훅 불어 껐다. 덕산이 이때 깨쳤다. 덕산은 기쁜 나머지 큰 절을 했다. 용담선사가 “그대가 어떤 도리를 봤기에!” 덕산이 대답하기를 “모갑(자기를 낮추는 말)은 오늘부터 천하의 노스님들의 설두(舌頭 설법)에 의심을 두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날 용담선사가 설법좌에 올라 말하길 “이 가운데 개한(대장부 또는 이놈)이 있어, 이는 검수(劍樹)와 같고 입은 혈분(血盆)과 같아서 때려도 꿈쩍하지 않으리라. 후일 고봉정상에 향하여 나의 도를 크게 일으키리라.” 덕산은 소초(疎抄)를 법당 앞에서 불사르며 하는 말이 “모든 현변을 궁할지라도 털끝 하나를 허공에 놓은 것과 같고 세상의 추기(樞機 경론을 말함)를 갈했다 할지라도 물 한 방울을 깊은 골에 던진 것과 같다.”고 외치고 하직했다. 《무문관》 제28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