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스님 법어/♣ 禪을 즐겨라

禪을 즐겨라 - 어릴 적 출가 유엄의 심인(心印) 얻어

아산 보문사 2016. 11. 10. 16:55

어릴 적 출가 유엄의 심인(心印) 얻어

선을 즐겨라 29-제2편 선승과 공안

 

 

36. 도오원지(道吾圓智 ?~835 靑原下)

또 다른 자료에는 종지(宗智)로도 나온다. 담주(潭州) 도오산의 원지 선사(圓智禪師)는 예장해혼(預章海昏)의 장씨(張氏)의 아들이다. 어릴 적에 출가하여 열반화상(涅槃和尙)에게 수계하고 약산의 유엄(惟儼)선사한테 심인(心印)을 얻었다. 뒤에 약산을 떠나 여러 산을 역방했는데 먼저 남전(南泉)선사에게 갔다.

남전: 도리(고승의 칭호)는 무엇이라 하는가?
종지: 종지라 합니다.
남전: 지에 이르지 못하면 무엇으로 종을 삼는가?
종지: 가장 싫어하는 곳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남전: 작연(灼然 빛나는 모양)하게 도착하면 두각(頭角)이 생긴다.

그 뒤 종지는 3일동안 운암(雲巖)과 함께 옷을 깁고 있었는데 남전이 재차 앞의 문제를 들고 상량(商量)했으나 결국 해결되지 않았다. 종지는 운암과 남전을 떠나서 약산(藥山) 곁으로 돌아왔다. 종지는 남전과의 문답을 들고 상량하기를 거듭했다.
어느날 위산(潙山)화상이 운암에게 물었다. “보리는 무엇으로 자리하는가?” 운암이 말하길 “무위로서 자리한다.” 그리고 운암은 다시 봉을 일전하고 위산에게 물었다. 위산은 여기에 대해서 “제법은 공(空)으로서 자리한다. 선사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며 봉을 곁에 있던 종지에게 돌렸다. 종지가 말하길 “앉는지 눕는지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라...”하고 역습했다. 위산도 과연 여기에서 나가버렸다.
또 종지선사가 오봉(五峯)에게 갔을 때 이러한 상량이 있었다.
오봉: 양산 노숙을 아는가?
종지: 모른다.
오봉: 어찌 모르는가?
종지: 모른다, 모른다.
종지는 봉(鋒)을 다시 해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오봉은 “동쪽에서는 전에 만난 일이 없다.”고 답했다.
선사는 뒤에 담주의 도오산에 있으면서 크게 진풍(眞風)을 떨쳤다. 어느 때 대중이 선사를 위하여 재를 마련하곤 공양하고자 했다. 그 때 한 스님이 물었다. “미심쩍다. 선사께서는 돌아오실 것인지요.” 선사가 답했다. “그대들, 재를 마련하는 것은 무엇에 쓸 것인가.” 더욱이 이때 제1조의 석상(石霜)과 한 문답이 있었다고 한다.
당(唐) 태화 9년 9월 병이 났다. 그로부터 10일이 지나 “나 지금 서천으로 가고자 한다. 동쪽으로 가지 말라.”는 말을 마치고 그대로 입적했다. 곧 다비해서 탑을 도오에 세운 뒤 뒤에 석상의 남쪽으로 옮겼다. 수일대사(修一大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삽화=강병호 화백


도오일가조의(道吾一家弔意)

도오가 점원(漸源)과 함께 상가에 가서 조의를 표했다. 점원이 관을 치며 말했다. “살아계십니까, 돌아가셨습니까” 이에 도오화상이 “살았다고도 못하고 죽었다고도 못한다.”고 대답했다. 점원이 “어찌 말 못하십니까?” 하고 다그치자 도오 화상이 “못한다, 못해.”라고만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점원이 “스님, 빨리 말해주십시오. 만약 말해주지 않는다면 화상을 치겠습니다.”했다. 도오화상이 “치고 싶으면 쳐라.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것을 말할 순 없다.”고 답하자 점원이 한 대 후려쳤다. 그후 도오화상이 천화했다. 점원은 석상을 찾아가 전에 있었던 일을 밝혔다. 그러자 석상화상도 “살았다고도 못하고 죽었다고도 못한다.” 했다. 점원이 “어째서 못하십니까?” 물으니 석상이 “못한다, 못해.”라고 답했다. 점원은 이 말에 단박 깨달음을 구했다.
어느 날 점원이 괭이를 들고 법당 위에 올라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석상화상이 이를 보고 “뭣하는 짓이냐?”고 물으니 “돌아가신 스님의 사리를 찾고 있습니다”고 답했다. 석상화상이 “온 천지가 스님의 사리로 가득 찼는데 어떤 사리를 또 찾는단 말인가?”하고 물으니 점원은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힘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고 말했다. 태원의 부상좌(孚上座)가 “스님의 사리는 아직 여기 있지 않소.”라고 덧붙였다. 《벽암록》 제55

37.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 靑原下) 

 약산의 가르침에 돈오
 동산과의 법거량 유명

담주(潭州)의 운암담성선사는 종릉건창(鐘陵建昌) 사람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다. 어릴 적 석문(釋門)에 출가하여 처음에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 곁에 가서 그를 모시기 20년이 되었으나 현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백장이 입적하자 약산의 유엄선사 곁으로 갔다. 거기에서 백장의 설법중 이해하지 못하였던 대목을 조목조목 물었다. 그중 백장이 법상에 올라가 대중을 한꺼번에 쫓아 낸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를 들은 약산이 “오늘 그대로 하여금 해형(海兄)을 뵐 수 있게 하겠노라.” 하였다. 그의 법기 됨을 안 약산의 말에 마침내 돈오가 이루어졌고 이윽고 약산의 법을 잇게 되었다.
그 뒤 선사는 위산과 선문답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위산은 운암이 백장 곁에 있었을 때의 사형이며 동학의 벗이었다. 또 약산 밑의 동학인 도오와도 상량한 일이 있었다. 특히 운암이 담주에 있을 때 동산양개(洞山良介)와 가졌던 상량은 유명하다.

동산: 다른 집 안에 전적(典籍)이 다소 있는가?
운암: 한 자도 아직 없다.
동산: 어찌해서 그렇게 많이 알게 되었는가?
운암: 밤낮 자지 않고 연구면려했기 때문이다.

당의 회창(會昌) 10월 병이 생겼다. 그달 26일 목욕을 끝내고 주지승을 불러 재 올릴 준비를 하라 일렀다. 그리고 “내일 상좌 있어 갈 것이다.”란 말을 남기고 밤에 귀적(歸寂)했다. 세수 60세. 선사를 다비하니 1천여 립의 사리가 수습되어 석분에 묻었다. 무주대사(無主大師)란 시호를 받았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