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스님 법어/♣ 禪을 즐겨라

禪을 즐겨라 - 남악 회하에 마조 단연 돋보여

아산 보문사 2016. 8. 6. 10:21

남악 회하에 마조 단연 돋보여

선을 즐겨라 ⑱-제2편 선승과 공안

 

20.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위기의 순간엔 내면 법력 표출
 국사삼환·남양정병 법당 유명

남양혜충 선사는 월주 제기현 사람으로 속성은 염(冉)씨다. 태어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어떠한 경로로 육조에게 갔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육조로부터 심인(心印)을 얻었다는 기록만 전해질 뿐이다. 혜충은 또한 위기의 순간 내면의 법력을 유감없이 행동으로 표출시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혜충은 말년에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알고 대종황제(代宗皇帝)께 청하여 백애산(白崖山) 당자곡(黨子谷)의 옛집으로 돌아갔다. 헤어질 때가 되어 대종이 물었다.
“국사께서 멸도한 후에 제자들은 무엇으로 공양케 할 것인가?”
혜충이 대답하였다.
“단월(檀越-施主)에게 알리고 오직한 기(基)의 흙무덤인 무봉탑(無縫塔)을 세우시오.”
대종이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탑 모양을 보여주시오.”
이 때 혜충은 한참 있다가, “아시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대종이 “모르겠소.”라고 대답하자 혜충은 “빈도(貧道-본인)가 떠난 뒤에 시자(侍者)인 응진(應眞)을 불러 물어보시요.”라고 말을 건넨 후 헤어졌다.
태력(太曆) 10년 12월 9일 우협(右脇)을 하며 입멸하니 당자곡에서 장사지내고 대증국사(大證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국사삼환(國師三喚)

국사(혜충을 가리킴)가 세 번 시자를 부르니 시자 또한 세 번 응한다. 이에 국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말하자면 내가 너에게 그르쳤는데 원래 네가 나에게 그르쳤구나.” 《무문관》 제17

충국사무봉탑(忠國師無縫塔)[숙종이 탑의 모양을 묻다.肅宗問塔樣]

숙종황제가 혜충국사에게 묻기를 “백년후에 무엇을 원하는가?”하니 국사 대답하기를 “노승을 위해서 무봉탑을 지어 주시오.”라고 대답한다. 황제가 “탑의 모양을 말해보시요.”라고 하니 국사 한참을 있다가 “알겠습니까?”라고 묻는다. 황제가 “모르겠소.”라고 하니 국사가 말하기를 “내 부법(付法)의 제자인 탐원(耽源)이 이 일을 알고 있으니 청컨대 그를 불러 물어 보십시요.”라고 한다. 국사 입멸 후에 황제가 탐원을 불러 그 뜻을 물으니 탐원이 말하기를 “상강(湘江-호남성 陽海山에서 발원하는 강이름)의 남쪽, 담강(潭江-武陵의 成王山에서부터 흐르는 강이름)의 북쪽”이라고 대답하다. 《벽암록》 제18 《종용록》 제85

충국사십신조어(忠國師十身調御)[숙종십신조어 肅宗十身調御]

숙종황제가 혜충국사에게 묻는다. “십신조어(十身調御)란 무엇인가?” 국사 말하기를 “단월이 비로정상(毘盧頂上-부처님 머리)을 밟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황제가 “과인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자 국사가 “스스로 청정법신이라 여기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했다. 《벽암록》 제99

남양정병(南陽淨甁)

한 스님이 혜충국사에게 물었다. “이 본신(本身)의 노사나(盧舍那)는 어떤 것입니까?” 국사가 “나에게 깨끗한 병을 갖고 오너라.”라고 하니, 그 스님이 깨끗한 병을 갖고 왔다. 국사가 말하기를 “있던 자리로 돌아가 편안히 계시게.”라고 하니 스님이 다시 “이 본신의 노사나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국사 대답하기를 “고불(古佛)의 지난 세월이 오래되었구나.”라고 하였다. 《종용록》 제42 

   
▲ 삽화=강병호 화백

21.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南嶽下)

강남의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는 한주(漢州) 십방현(什邡縣) 사람이다. 성은 마(馬)씨로 그 용모와 풍채가 매우 기이하여 걸음걸이는 소와 같고 사물을 바라 볼 때는 호랑이와 같았다고 한다. 또한 발바닥에는 두 개의 고리 모양이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자주(資州)의 당화상(唐和尙)에 의해 출가 삭발하고 유주(愈州)의 원율사(圓律師)를 따라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당나라 개원(開元)년에는 충악산(衝嶽山) 전법원(傳法院)에서 선정(禪定)을 닦았다. 여기에서 종종 남악회양선사(南嶽懷讓禪師)를 만났다. 남악은 도일이 조사의 법기(法器)가 있음을 꿰뚫어 보고 말을 걸었다. “대덕께서는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 합니까?” 이에 마조가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니 남악이 기왓장 한 장을 들고 와서 마조가 좌선하고 있는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두 사람 사이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오고 간다.
“기와를 갈아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한다.”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든단 말인가?”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 있는가?”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
“소에 수레를 맬 때,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소를 때려야 옳은가?”
여기에서 마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남악은 마조를 친절히 지도하였다. 마조가 남악을 모시며 수행을 거듭하기를 실로 십년, 이윽고 그 법을 이었다. 비록 동참자가 여섯이었으나 “나의 마음을 얻어 고금에 통하였다”라고 남악은 마조를 평하였다. 후에 건양(建陽) 불적령(佛迹嶺)에서부터 임천(臨川)을 지나 남당(南唐) 공공산(贛公山)에 이르렀고, 대력년(大曆年)에는 종릉(鐘陵) 개원사(開元寺)에서 머물렀다. 마조의 이름을 듣고 사방에서 구름이 모이듯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그의 문하는 대단히 번성하였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