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운스님 법어/♣ 禪을 즐겨라

禪을 즐겨라 - 空사상의 오묘한 이치 터득

아산 보문사 2016. 10. 2. 16:27

空사상의 오묘한 이치 터득

선을 즐겨라 23-제2편 선승과 공안

 

 

25.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南嶽下)

지주(池州) 남전(南泉)의 보원선사(普願禪師)는 정주(鄭州) 신정(新鄭) 사람으로 성은 왕(王)씨이다. 당나라 지덕(至德) 2년 열 살 때에 대외산(大隗山) 대혜선사(大慧禪師)를 따라 출가하여 숭산(嵩山)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배워 성상(性相)의 학문을 닦았다. 뒤에 능가경(楞伽經) · 화엄경(華嚴經) · 중론(中論) · 백론(百論) · 12문론(十二門論) 등을 배워 공(空)사상의 오묘한 이치를 닦았다. 이윽고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의 문하에서 문득 깨달음에 들어 유희삼매(遊戱三昧)를 얻었다.

 육긍대부가 도풍 흠모
 관아에 초청 법문들어
 명성 듣고 수백명 몰려

어느날 스님이 여러 대중들을 위하여 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마조대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마조: “통(桶)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남전: “이 늙은이야. 입 닥치고 가만히 있지 무어라 투덜대노?”
그러자 마조는 잠자코 방장으로 돌아갔다.
정원(貞元) 12년(48세) 석장(錫杖)을 지주(池州)에 두고 남전(南泉)에 선원을 지어 머무르면서 산 아래로 내려가지 않은 기간이 실로 30여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에는 스스로 수행하고 찾아와 도(道)를 구하는 자들을 지도하였다.
태화(太和) 초에 선주성(宣州城)의 자사(刺史) 육긍대부(陸亘大夫)가 스님의 도풍(道風)을 흠모하여 스님을 청하여 제자(弟子)의 예를 갖추고 군(郡) 관아(官衙)에서 법을 들었다. 이로부터 스님의 명성이 더 높이 멀리까지 알려지게 되어 사방에서 몰려온 학도는 항상 수 백명을 넘었다고 한다. 스님이 처음 선주성에 들어올 때, 육긍대부는 스님을 성문에서 맞았다. 그리고 성을 가리켜, “모든 사람들이 옹문(雍門)이라고 부르는데 스님께서는 무슨 문이라고 부르면 좋겠습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노승이 만약 무어라 말한다면 대부(大夫)의 교화를 부끄럽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으렵니다.”라고 하였다. 대부가 거듭 묻기를, “갑자기 도적이 나타났을 때에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하자, 스님은 “노승의 죄가 크군요.”라고 하였다. 또 “대비보살(大悲菩薩)이 허다한 손과 눈으로 무엇을 합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국가의 경우에는 대부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합니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답하였다. 스님은 단월육긍대부(檀越陸亘大夫)를 위하여 때로는 대부를 찾아가 설법하였다. 이런 문답이 있다.

  
▲ 삽화=강병호 화백


대부: “제가 대체로 불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전: “대부께서는 온종일 무엇인가를 만드시나요?”
대부: “매 시간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남전: “아직도 해하(楷下)의 사람이군요.”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도(道)를 깨달은 군주는 지혜로운 신하를 쓰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육긍대부를 위한 설법은 이와 같이 친절하였다. 대부는 스님의 교화에 의하여 자신의 도를 깨닫기 위한 일념을 함양하고 동시에 선정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 스님이 한 책을 시승(侍僧)으로 하여금 수유(茱萸)에게 갖다 주게 하였다. 그 책에는 “이치는 일에 따라 변하니 관곽(寬廓)이라 해서 그 밖[外]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이란 이치를 얻어야 통하니 고요하다 해서 안[內]이 아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시승이 그 책을 수유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문: “관곽이라 해서 밖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답: “하나를 물어 백을 답하게 하는 것이로다. 그래도 거칠게 없지.”
문: “고요하다 해도 안이 아니라는 말은 또한 무슨 뜻인가요?”
답: “성색(聲色)과 마주한다면 이 또한 좋은 수가 아니지.”

시승은 다시 장사(長沙)에게 물었다.
문: “관곽이라 해도 밖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장사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똑바로 떠 보였다.
문: “고요하다 해도 안이 아니라는 말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장사는 이번에는 눈을 감아 버렸다.

시승은 조주(趙州)에게 물었다.
문: “어찌하여 관곽이라 해도 밖이 아니라는 것이옵니까?”
조주는 음식을 먹는 시늉을 했다.
문: “무엇을 고요하여도 안이 아니라고 합니까?”
조주는 손으로 입을 닦는 흉내를 해 보였다.

시승은 돌아와 일의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남전은 그 보고를 듣고 “그들 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내 제자답다. 훌륭한 제자로다.”하고 칭찬하였다. 스님의 제자에 대한 가르침이 매우 친절하면서도 기봉(機鋒)은 준엄하였다. 남전참묘(南泉斬猫)와 같은 고사는 실로 통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스님이 임종할 때가 되어 제일좌(第一座)가 물었다.
문: “스님께서는 백년 뒤에 어디에 계실 겁니까?”
답: “산 밑에 한 마리 암소가 되어 있어 있을 것이다.”
문: “저도 스님을 따라가려고 하는데 되겠습니까?”
답: “네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억새풀 하나를 물고 오너라.”
병이 위중해지자 제자들에게 “별 빛이 반짝인지 또한 오래이니 나는 간다고 말하지 말라.(星翳燈幻亦久 勿謂吾有去來)”라는 말을 마치고 시적(示寂)하시니, 태화(太和) 8년 12월 25일이다. 법사(法嗣) 가운데 장사경잠(長沙景岑) · 조주종심(趙州從諗) 등이 가장 뛰어났다.

남전참각묘아(南泉斬却猫兒) [남전양당쟁묘 南泉兩堂爭猫] [남전문조주 南泉問趙州]
하루는 동서 양당의 스님들이 고양이 새끼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남전선사가 고양이 새끼를 번쩍 집어 들고 “대중들아! 누구든 맞게 대꾸하면 살려줄 것이요, 만약 맞지 않으면 베어 버리겠다.”고 하자 어느 사람도 대꾸가 없었다. 스님은 고양이 새끼를 두 동강 내어 버렸다. 조주가 외출에서 돌아오자 스님은 조주에게 낮의 일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자 조주는 아무런 말도 없이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갔다. 스님은 ‘만약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는 죽지 않았을 것을......’이라고 하였다. 《종용록》 제9 《무문관》 제14 《벽암록》 제63 제64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