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배우기/♣ 법문

업보사상(業報思想) (기해년 7월 보름법회)

아산 보문사 2019. 7. 20. 13:15



업보사상(業報思想)

 

올바른 인생관의 확립

불교의 업보설(業報說))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고()와 락(), 행복(幸福)과 불행(不幸), 즉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행위(karma)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운명은, (절대자)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숙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우연의 산물도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자신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불교 업설은 한 마디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교설(敎說)로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 또는 선인낙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人苦果)의 인과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우리 속담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초기 경전은 인과응보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합니다.

中阿含무릇 사람은 씨앗을 뿌리는 대로 그 열매를 거둔다. 한 행위에는 선의 열매가, 한 행위에는 악의 열매가 맺는다. 사람은 씨앗을 심어 스스로 과보를 받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위와 같은 평범하고도 상식적인 진리를 외면한 채, 잘못된 세계관과 인생관에 빠져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역사나 개인의 운명이 어떤 절대자의 뜻이나 각본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스스로 바르게 행동하고 열심히 함께 노력하기보다는 미신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광적인 신앙으로 종말론자가 되어 건강한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전생에 스스로가 지은 숙명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걸핏하면 철학관을 찾고 점을 치며, 사주가 좋지 않다하여 굿에 의지하다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연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하지 않고 도박의 노예가 되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에 빠지며 향락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타마 붓다가 살았던 당시의 인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지구촌에도 적잖이 볼 수 있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믿는 사람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의 지식과 인생의 지혜를 부단히 배우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행동하며, 겸허히 기다리고 인내해야 합니다. 이렇게 불교 업설(業說)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인간으로 하여금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원리(根本原理)이자 기초인 것입니다.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돌아보면, 인류역사는 차별의 역사요 불평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분과 계급은 물론 종교와 직업, 인종과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오랫동안 인류 역사발전에

걸림돌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인류사회에서 극단적인 노예제도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도의 바르나-카스트제도와 같은 계급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지역이 적지 않습니다.

지구촌 한편에서는 인간해방을 넘어

동물해방을 외치고 있지만, 반면에 선진국에서도 인종차별이 엄존하고, 문명국가에서도 남녀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학벌이라든가 출신지에 따른 차별 등의 악습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별은 모든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인류역사의 궁극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축출되어야 합니다.

 

불교 업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또는 인격의 기준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인간의 행위(karma) 자체에 둠으로써 불합리한 것들의 개입을 차단하고 인간 평등의 실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합니다. 초기경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기경전] “태어남에 의해 천민이 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에 의해 천민이 있게 되고, 업에 의해 바라문이 있게 된다.”

이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에 의해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행위와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 교단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근본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모두가 평등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바다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마치 갠지스 강, 야수나 강, 아찌라와띠 강, 사라부 강, 마히 강과 같은 큰 강들이 바다에 모여들면 이전의 이름을 잃고 단지 바다라는 이름을 얻는 것과 같이 四姓도 여래가 가르친 을 따라 출가하면 이전의 종성을 버리고 똑같이 釋子(석가세존의 자식)라고 불린다.”

 

인간의 가치는 권력이나 재력, 가문이나 직업 등에 의해 규정되지 않습니다. 업설에 따르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남에게 악을 행하여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천한 사람이며, 부지런히 선을 행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고 선행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가치 있는 귀한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잇다는 의미에서 평등하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은 인간 평등의 원리적 토대가 되었고 이것은 석존이 불교 업설에 근거하여 당시 인도 사회의 사성계급제도를 비판한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인류사회의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이며 그 안에서 평화행복을 얻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