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배우기/♣ 법문

불교의 수행은 삼업(三業)을 청정(淸靜)히 하는 것. 무술년 삼월 보름 법회

아산 보문사 2018. 5. 14. 16:58

 

 

불교의 수행은 삼업(三業)을 청정(淸靜)히 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하여 전체를 한 번에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팔만사천의 법문이란 중생의 번뇌가 이처럼 많다는 뜻이며, 중생 번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방편의 약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佛法)은 중생의 번뇌(煩惱)=()에 맞추어 진실된 가르침으로 처방하는 법문(法門)=()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서 방편법문(方便法門)이라고 하는데, 이를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합니다. 번뇌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서 자신을 괴롭히는 병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번뇌를 제거할 수 있는 진실한 가르침을 통해서 번뇌의 본질과 이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게 될 때 우리는 번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불법의 수행은 자신을 불안에서 평안함으로,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무명의 어두움에서 지혜의 광명으로 전환하게 하는 것이며, 근원적인 본래심의 자각을 통한 지혜로운 삶을 가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을 함양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즉 불법의 실천 수행은 자아의 자각과, 지혜와 인격 형성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형상적인 삶의 좌표가 되는 계율(戒律)과 자신을 되돌아보고 언제나 자각적인 삶과 지혜를 창출하게 하는 선정(禪定), 그리고 인격적인 삶을 만들어 가는 지혜(知慧)가 수행생활의 실천덕목(實踐德目)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과 팔정도(八正道), 육바라밀(六波羅密)은 대 소승불교를 통해서 불교 수행의 구체적인 실천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모두 자신의 삼업청정(三業淸淨)의 구체적인 수행으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법의 수행이 왜 삼업청정(三業淸淨)의 수행이 되는 것인가?

인간은 신구의(身口意) 이 세 가지의 작용과 행위로 인간 일체의 생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려고 마음먹는 의지작용이 의업(意業)이며, 그것을 신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신업(身業)이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구업(口業)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과 입이 하나가 될 때 사람들은 본래의 자신을 회복하여,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채비를 차리게 되는 것이알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율장(律藏)에도 입을 잘 간수하고, 뜻을 잘 수습하여, 몸으로 나쁜 일을 번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수행자는 깨달음(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리라!” “수구구의신막범 여시행자득도세”(守口構意身莫犯 如是行者得度世)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몸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을 지라도 마음으로는 온갖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번뇌를 일으켜 괴롭고, 슬프고, 기쁘고, 울고, 웃고, 자신을 시끄럽고 산란스럽게 만들면 역시 불안하고 괴로움에 빠져지는 것입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생()이라 하고,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사()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번뇌가 일어나고 없어지고 하는 연속 속에 살고 있기에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번뇌)속에서 부침(浮沈)한다고 말하며, 이것을 선에서는 생사윤회(生死輪迴)한다고 말합니다.

 

불법은 심법(心法)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중생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에서 생사윤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번뇌가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신구의(身口意) 곧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과 깨달음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먼저 신업청정(身業淸淨)의 수행으로는 불교인으로서 계율을 수지하고 청정한 지계생활(持戒生活)을 하는 것에서 목욕재계하고 진심으로 합장 예불을 하며, 일체중생을 공경하는 마음과 자세를 들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구업청정(口業淸淨)의 수행은 경전을 독송하며 불법의 참된 정신을 자각하며, 또한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의 성호(聖號)를 입으로 외우면서 염불하는 구체적인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구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업청정(意業淸淨)의 수행은 번뇌의 마음, 즉 망심(妄心)을 일으키지 않고 언제나 청정하고 깨끗한 본래 심으로 자신의 일상생활을 만들어가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자각을 통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몸은 바르게 앉아 합장하고, 입으로는 열심히 성호(聖號)를 외우는 염불을 하고 있을 지라도 마음이 다른 분별심(分別心), 차별심(差別心)에서 떨어져 번뇌를 일으키면 몸과 마음은 두 가지 작용을 하게 되므로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두 살림을 하게 됩니다. 신구의, 곧 삼업이 일치하지 않게 되므로 삼업청정(三業淸淨)의 수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되며, 삼업이 청정하지 않으면 불교의 올바른 수행과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의 수행의 기본은 삼업을 청정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구경열반(究竟涅槃)에 이르는 길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삼업을 청정히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