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배우기/♣ 법문

삼학(三學) 계(戒), 정(定), 혜(慧) (무술년 2월 보름법회)

아산 보문사 2018. 4. 7. 14:54

 

삼학(三學) (), (), ()

 

불법을 닦아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하여야 할 세 가지 배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삼학(三學)이라고 하며, [계학]은 마음의 청정을 지키고 몸을 단속하여 나쁜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몸을 보호하는 계율입니다. [정학]은 마음의 산란함을 그치고 고요하고 평안하여 한결같은 경지를 나타내는 법입니다. [혜학]은 모든 번뇌를 없애고 진리를 꿰뚫어 보는 법을 말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에게 계행이 없으면 마음이 흔들리고 방종해져서 청정한 본성을 보지 못하게 되며, 마음이 흔들리고 산란해지면 지혜가 없어 옳고 그름과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여 수행은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통 삼학을 말할 때 계()를 그릇에 비유하여, 그릇이 깨끗하고 단단하여야 그곳에 맑은 정()의 물이 담기게 되고, 정의 물이 맑고 고요해야 거기에 밝은 지혜의 달이 원만하게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물질로 향기가 그윽한 향을 만들 수 없듯이 계의 그릇이 깨지고서는 거기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계는 단순한 금지사항이 아니라, 우리의 불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행위규범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수행과 실천의 목표는 계··혜 삼학 완성에 있는 것이며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빠지면 구경열반의 경지게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 부처님께서 친히 제정하시어 교단을 통치하게 한 중요한 청규, 법규.

() : 자기의 근본을 깨달아 실질적으로 자기완성을 돕게 하는 수행 방법.

() : 번뇌를 없애고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도록 하는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삼학은 서로 도와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그것은 계()에 의하여 정()을 얻고 정()에 의하여 혜()를 얻음으로 이것을 불가분의 관계로 어느 하나가 없이는 불교의 이상인 피안의 세계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율논(經律論) 삼장에 비유하자면 [경은 정학] [율은 계학] [논은 혜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존께서 재세시(在歲時)에는 제자들이 경, , 논 삼장을 함께 닦아왔으나 불멸 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이것이 분열되어 선종, 교종, 율종, 독립되어 분야별로 발전 수행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셋이 나누어져 있더라도 공통적으로 수행과 그 실천을 아니 할 수 없기 때문에 계학과 경학을 무시하고 선학만을 중요시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수행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엄경 믿음만 있고 이해가 없으면 무명만 증장하고, 이해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도리어 사견(邪見)만 생긴다.”

 

*()라는 것은 방비지악(防非止惡)으로 그른 것을 막고 악한 것을 그치는 것이 계율의 목적입니다. 이것을 크게 두 가지로 선계(善戒), 악계(惡戒)로 구분합니다.

 

*선계(善戒)라는 것은 선은 짓는 작선 작복이 계를 지키는 것이고 선을 그치는 것이 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악계(惡戒)라는 것은 악을 짓지 않는 것이 계를 지키는 것이 되고 악을 짓는 것을 계를 범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무비 자성계 (心地無非 自性戒) 마음이 그름이 없으면 계를 지닌 것이며

심지무란 자성정 (心地無亂 自性定) 마음이 어지러움이 없으면 정에 들게 되며

심지무치 자성혜 (心地無痴 自性慧) 마음에 어리석음 없으면 지혜를 얻게 된다.

 

경에 지계만 잘 하여도 모든 이의 존경을 받고 복덕이 스스로 자란다.” 이 세상에는 누구나 다 복을 받고 잘 살기를 희망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공부도 문복이 없으면 안 되고, 벼슬도 관복이 없으면 안 됩니다. 글공부는 자기가 부지런히 노력하면 무식은 면할 수가 있고, 또 벼슬도 자격과 신용과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미관말직이라도 할 수 있지만, 재물에는 전생에 지은 복이 없으면 아무리 부지런히 벌고 안 쓰고 안 먹으며 근검저축을 하더라도 큰 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조금 모았더라도 사업이 실패하던지 사기를 당하던지 재난을 당하여 물질에 궁핍을 받는 사람은 전생에 복을 닦지 않은 결과입니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란 말도 인도어로써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입니까?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무엇 때문에 왔다 가는지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래무일물래 거역공수거 만반장불거 유유업수신(來無一物來 去亦空手去 萬般將不去 唯有業隨身)

올 때에도 한 물건도 없이 왔으며, 갈 때에도 또한 빈손으로 가나니라.

만 가지가 있더라도 장차 가지고 가지 못하나니, 오직 없이 있어 이 몸을 따르느니라.

 

불법은 참 나를 깨달아 자기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운동은 각자의운동이라 하는데 참 생명의 이치, 우주만유를 덮고도 남을 참 사랑 이러한 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 에너지는 어두운 것을 밝히는 작용을 하므로 빛의 운동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은 곧 진리의 광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므로 진리의 운동이라 합니다. 따라서 불교의 목적은 참 나를 발견하여 생명 에너지를 키워 나가서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廻向)하는 것입니다.

 

불자 여러분! 무엇 때문에 사는가? 돈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잘 먹으려고, 오래 살려고 사는 것입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삶의 목적이 아니고 삶의 방편이요, 수단이요, 의지이지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결국 인생은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성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것은 모두가 결국은 자기를 복되게 하고 행복하게하기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깨닫지 못하고 돈이나, 명예나, 사랑이나 기타 어떤 것이던 그의 노예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삶은 결정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