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주 큰스님

"석주스님의 생애와 만해사상" 학술 세미나

아산 보문사 2021. 7. 27. 13:15

 

석주스님의 생애와 만해사상 학술 세미나

 

만해학회에서 제21차 만해축전을 맞이하여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세미나 주제는 희망 극복의 시대, “석주스님의 생애와 만해사상으로 8 9일 오후 2시 강원도 인제 동국대 만해마을에서 열린다.

 

석주스님(1909~2004) 1923년 여름 남전스님을 은사로 서울 안국동 소재 선학원에서 출가한 후 행자생활을 할 때 만해스님을 처음 만나 가까이서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인연이 있다. 석주스님은 생전에 뜻이 맞지 않으면 한 치의 용서도 없이 불호령을 내리시던 스님이기에 혼자 서 있는 소나무처럼 늘 외로워 보였다고 만해스님을 회고한 바 있다.

 

이번 만해학회 학술 세미나 발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석주의 삶과 한용운(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

* 석주의 생애와 포교사상(김응철 중앙승가대 포교학과 교수)

* 석주 정일대종사의 교육활동과 중앙승가대(김상영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

* 석주스님의 불교혁신 활동(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 석주스님의 생애와 근현대 불교사 기록(이경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 한용운과 여운형의 민족독립에 대한 인식 비교(이선이 경희대 한국어학과 교수)

* 만해 한용운 가문과 생가지에 대한 재고(한건택 내포관광진흥원원장)

* 선시(禪詩)의 어법(전기철 전 숭의여대 문창과 교수)

 

1부 세미나

2부 만해한용운연구소 공모 창작곡을 비롯해 연주, 판소리, 독창

3부 만해스님의 시 10편 낭송

 

석주(昔珠)당 정일(正一) 대종사 행장

 

* 한국 현대불교의 산 증인 *

석주 큰스님은 한일합방 한 해 전인 1909년 경북 안동에서 탄생하셨습니다. 15세가 되던 해인 1923년 서울 선학원에서 남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6년간 선학원에서 행자생활을 하시고 1933년 법어사 강원 대교과를 마쳤습니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 금강산 마하연, 덕숭산 정혜사, 묘향산 보현사 등 제방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 참선 정진을 하시며 수선안거를 성만하셨습니다.

 

1958년 불국사 주지를 역임하신데 이어 1961년 선학원 이사장, 1976년 은해사 주지,

 

1977년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 1971,1978,1984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3차례 역임하시는 등 종단행정을 두루 맡으셨습니다. 또한 역경과 교육 사업에 남다른 원력을 가지고 1989년부터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 1970년 청소년 교화연합회 총재,

 

1980년 중앙승가대학교 초대 학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1994년 충남 아산에 보문사를 창건하시고 외로운 노인을 위한 사회복지시설 안양원을 설립해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 평생을 바친 역경불사의 원력 *

석주 큰스님은 평생 역경에 대한 원력을 세우셔서 한국전쟁 이후에 선학원에서 불교사전을 출판하셨던 운허스님과 함께 1961 5월 현 동국역경원의 전신인 법보원을 설립하여 역경불사에 활력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열반경, 법화경, 유마경, 육조단경, 현우경, 선가귀감 등을 번역 출판하셨고, 부모은중경, 목련경, 우란분경은 직접 번역하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1964년 동국역경원 설립이후에는 운허스님과 함께 한글대장경 편찬사업에 착수, 37년만인 2002 9 318권의 한글대장경을 완간하셨습니다.

 

1989년부터는 동국역경사업 진흥회의 이사장을 맡으시어 역경사업의 활성화에 진력하신 바 있습니다. 큰스님의 역경불사 원력은 주석하시던 칠보사의 대웅전을 친히 큰법당이라고 현판을 바꾸시고 우리말 경전 보급에 친히 앞장서셨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불자들에게 한글대장경이라는 귀중한 한글 경전이 출현하여 진리의빛을 열어준 것은 모두 석주 큰스님의 원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불교혁신에 헌신하시다. *

석주 큰스님은 선학원에서 수행하시는 동안 만해 한용운 스님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선각자들과 교유하시며 민족의식을 싹틔우셨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해방직후부터 석주 큰스님을 왜색불교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운동에 앞장서게 만들었습니다.

 

해방직후에 어떻게 해서든 불교를 혁신시키자는 기치아래 불교혁신운동을 일으키셔서 경봉, 용담, 대의, 석기, 스님과 조명기 박사와 이구열, 장상곤 등의 불교 청년, 그리고 혁신회를 만들었던 이종익 박사와 여성동맹이 모두 모여 통도사의 경봉스님을 이사장으로 1946년 불교혁신 연맹을 조직하셨습니다.

 

1953년부터는 왜색불교 청산을 위해 불교 정화운동을 주도하셔서 마침내 불교 정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큰스님의 저서 한국 불교 근세 100’(중앙일보사 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불교혁신운동과 정화운동을 주도했던 큰스님은 종단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바른 길을 제시하고 그 길에 앞장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나 이른바 94년 종단개혁과정에서는 개혁회의 의장을 맡아 종단개혁을 손수 지휘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이처럼 현 조계종의 역사의 현장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에서 바른 길을 제시하셨기에 현대 한국 불교의 산 증인이라고 일컬어지고 계십니다.

 

* 평생 포교에 헌신하시다 *

석주 큰스님은 종단이 아직 어린이 포교에 역량을 투입하지 못했던 1965년에 칠보사에어린이회를 창립하시어 어린이 포교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셨으며 1966년에는 대한불교청소년 교화연합회 고문. 1970년 동회에 총재를 역이마시는 등 청소년 포교에도 큰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또한 총무원장으로 재직하시던 1975년에는 부처님오신 날을 공휴일 지정하도록 허여 오늘날 부처님오신 날을 모든 국민이 경축하게 하도록 만드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큰스님의 이러한 포교의 원력으로 1977년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을 역임하신바 있고 평생 청소년 교화와 경전의 한글화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제2회 포교대상을 수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후학들의 양성에도 노력을 이끼지 않으셨으니 1980년 중앙승가대학교 초대 학장,

1988년 동 대학 명예학장을 역임하시면서 현대식 승가교육의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만년에도 큰스님께서는 칠보사와 봉은사의 조실로 주석하시면서 불자 대중들의 교화에 매진하셨습니다. 1997년부터는 큰스님과 같은 연배인 노인들의 복지를 위하여 온양 보문사에 불교사회복지시설인 안양원을 설립하시어 외로운 노인들의 노년을 위한 복지사업에 매진하셨습니다. 이처럼 큰스님은 실로 평생 동안 포교활동에 헌신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