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운 큰스님

(국제불교방송) 아산 보문사 주지 송운스님

아산 보문사 2016. 1. 20. 21:10

 

 

 

아산 보문사 주지 송운스님은 어린이 법회 산 증인이다. 어린이 법회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인 1970년대 서울 칠보사에서 어린이법회를 열어 새싹들을 양성했다. 선명회에 버금가는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실제 미국 등지를 다니며 공연을 했었다. 석주스님을 모시고 어린이 법회를 비롯 포교에 헌신해온 송운스님을 지난 7월 말 만났다.

 

 

“믿음을 바탕으로 지혜 실천하는 불자 되길”


평생의 스승 석주스님 만나 새싹포교 중요성 깨달아
어린이 청소년 법회 열고 합창단 만들어 순회공연


보문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 충남 아산 현충사 바로 곁에 있다. 기업도시로 부상하는 탕정과 인접하고 조금 더 서쪽으로 가면 서해안과 만나는 풍요로운 지역이다. 서울 칠보사에서 주석했던 석주스님(1909~2004)은 말년에 이곳에 머물렀다. 스님의 기념관을 비롯 생전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그러나 보문사에서 석주스님을 가장 깊게 그리고 생생하게 만나는 지점은 기념관이나 건물 공간이 아닌 송운스님이다.

아침을 막 넘긴 시간인데도 여름 한 낮 태양은 무섭게 내려앉았다. 외국인 학인스님 한 분이 사시 마지를 올리려 법당을 오가다 웃으며 인사를 받는다. 합장 인사를 해도 무표정하거나 근엄한 표정을 풀지 않는 한국의 스님들과는 많이 다르다. 우렁찬 합창소리가 울려 퍼진다. 곧 있을 공연 연습 중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에서 만난 외국인 스님처럼 송운스님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스님은 얼마 전 까지 석림동문회장을 지냈다. 동국대 종비생으로 수학한 스님들의 모임이다. 송운스님은 1970년대 중반 학교를 다녔다. “별 것도 아닌 저를 만나려 이렇게 멀리까지 더운데 오셔서….” 다과를 내던 스님이 인사를 건넸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송운스님은 석주스님의 상좌다. 상좌 중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석주스님을 모셨다. 무엇보다 석주스님이 하시는 일을 곁에서 거들어 그 유업을 잇는 분이 바로 송운스님이다. 스님은 하지만 스님의 은상좌가 아니다. 건당(建幢) 상좌도 아니다. 송운스님의 은사 스님은 월정사 희찬스님이다. 월정사 주지를 지내고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한 현해스님이 사형이 된다. 스님의 법명이 현보다. 월정사에서 출가해 탄허스님이 화엄경을 번역할 때 시봉했다. 정화 직후 비구승과 대처승이 월정사 경내를 반분해 서로 다른 공간에 머물며 공양도 따로, 공부도 따로 할 때 현장을 지켰으며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복원할 때도 힘을 보탠, 월정사의 어른이다. 지금도 스님의 재적 본사는 월정사다.

스님이 석주스님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서울에서 공부를 하면서다. 출가 후 종단이 3대사업을 정하고 승려들 교육에 관심을 기울일 무렵 스님도 월정사를 떠나 서울로 왔다. 청담스님이 도선사에 싣달학원을 개설하고 도제를 양성하자 스님도 입방했다. 청담스님을 시봉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곳에서 청담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찾아오던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를 보고 도선사가 변모하는 광경도 지켜보았다. “청담스님께서는 당시 한국불교가 중흥을 하려면 3대 사업을 실천해야한다고 강조하셨다. 포교 역경 도제양성 이 셋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신 분이 바로 청담스님이다. 특히 젊은 우리들에게 공부를 강조하셨다.” 송운스님의 회고다. 탄허스님을 모시고 경전 번역을 옆에서 돕고, 청담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며 3대사업의 중요성을 배운 송운스님은 마지막으로 도심 사찰 칠보사로 옮긴다.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 석주스님을 만난다.

 

 

“출가동기 평생 간직한다면 좋은 수행자 될 수 있어”
수행 없는 중생교화 허공에 메아리…초심 잃지 말아야

 

 “큰 스님께서 저에게 청소년 포교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전국의 도심 사찰에 어린이 청소년 법회를 만들고 포교를 해야 한국불교가 중흥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송운스님은 최선을 다해 스승의 뜻을 받들었다. “당시 청소년교화연합회가 만들어져 활동 중이었고 운문스님이 지도하는 조계사 어린이회 등 전국에서 30여개의 어린이 법회가 운영 중이었다. 나는 칠보사 어린이회를 이끌고 종묘 등지에서 사생대회를 열고 1년에 한번 세종문화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했다. 미국 순회공연도 3회를 했으며 부처님오신날에는 국가원수조찬기도회 등에서 공연을 했다.” 그때 공연을 음반으로 제작했는데 LP판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 모든 불사 뒤에는 석주스님이 있었다. “큰 스님은 절에 돈이 들어오면 모두 어린이 포교에 쓰라고 하셨다. 스님이 얼마나 어린이 포교에 관심이 많았는지 운문스님을 총무원 재무부장으로 임명한 사례로 알 수 있다. 큰 스님은 운문스님과 스님이 지도하던 조계사 연화어린이회를 아주 높이 샀는데 이를 지원하기 위해 총무원장으로 계실 때 운문스님을 재무부장으로 임명하셨다. 어린이 법회에 도움이 되라는 뜻에서였다.”

어린이 합창단을 이끌고 미국순회공연을 하던 송운스님은 하와이 대원사에서 대원스님을 도와 불사를 하고 미국 본토로 건너가 불광사 여래사 등을 맡아 운영했다. 1999년 다시 한국으로 와 아산 보문사를 창건하는 책임을 맡는다. 미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거치며 공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초기 5년간은 칠보사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자립하며 석주스님의 유업을 받드는 근본도량으로 발전시켰다. 지역포교를 위해 불교대학을 개설하고 요양원을 만들었다. 10년째 아산사암연합회장을 맡아 지역포교와 발전에도 헌신하고 있다. 이 모든 불사의 바탕은 늘 석주스님이다. 스님에게 석주스님은 어떤 분일까. “한 마디로 수행자들의 표본이셨다. 청정하셨으며 근검하셨고 수행자의 귀감이셨다. 매일 108 참회를 하시고 조석으로 정진하시면서 수행과 포교를 병행하셨는데 큰 스님께서는 수행도 중생교화를 위해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수행 없는 중생교화는 허공에 메아리이므로 수행과 포교가 함께 가야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초심을 잃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출가할 때 그 동기를 일생 간직한다면 평생 좋은 수행자로 남을 것이라고 깨우침을 주셨다.” 스님의 회고가 계속된다. “불교학자 중에서 포교하는 분들에게 특히 관심이 많으셨다. 중.고등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군법사가 와서 장성들에게 선물하려한다면 주저 없이 글씨를 주셨다. 미주 현대불교가 어렵다고 하자 500여 불자들 수계하고 받은 돈을 전부 보시하셨다.”

어지간해서는 화도 역정도 내지 않고 늘 자애롭고 온화했던 석주스님이지만 수행자의 원칙과 삶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단호했다. 바둑을 즐겨하던 송운스님에게 석주스님은 단 한마디로 바둑을 끊게 했다. ‘바둑을 하려면 내 문하에서 나가라.’

송운스님은 칠보사에서 석주스님을 모시며 포교뿐만 아니라 여러 큰 스님들을 만나며 공부를 배웠다. “서울 중심에 자리한 칠보사에는 고관대작과 그 부인들도 자주 찾아와 스님을 친견했으며 우리 종단의 고승대덕도 빠짐없이 찾아오셔서 머물다 가셨다.”

당신의 뜻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잘 수행하는 제자를 정식 상좌로 받아들이고 싶어 했지만 송운스님은 건당하지 않았다. 석주스님이 희찬스님은 상좌가 많으니 송운스님을 상좌로 달라고 했는데 결국 승적은 그대로 두고 상좌가 되기로 했다. 두 어른이 그렇게 정한 것이다. “미국을 여행하는데 스님이 ‘송운이 이리오라’해서는 밤새 한국불교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니가 와’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생하다”는 송운스님은 “명을 받아 큰 스님을 닮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돌이켜 보면 신발 벗고도 못 따라갈 분이셨다”고 말했다.

스님은 끝내 당신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내지 않고 은사스님 말씀뿐이다. 독자들을 위해 가르침을 달라고 거듭 부탁하자 스님은 “불교는 믿음이 바탕이 되야 한다. 믿는 것에 대해 알아야하고 알았으면 한 가지라도 실천하는 불자가 돼야한다”고 말했다.

 

송운스님은…

월정사에서 희찬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탄허스님과 청담스님을 시봉했으며 1960년대 말부터 칠보사에서 석주스님을 모시고 어린이 청소년 법회를 맡아 운영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을 종비생으로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불광사 주지 등을 역임하며 해외포교에 힘썼다. 1999년 아산 보문사를 창건해 아산천안지역 포교를 담당하고 있다. 동국대 석림동문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지역사암연합회장이다.

아산=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 2647호/ 8월14일자]